이현승 - 용의주도

사무엘럽 2021. 1. 22. 10:09

 

친애하는 사물들:이현승 시집, 문학동네 생활이라는 생각 : 이현승 시집, 창비

 

 

 도주 경로를 가리키는 혈흔처럼 꽃이 피었다

 개활지에서 더 깊고 높은 방향으로 야생은 사라진다

 

 개화와 낙화의 사이에서 난분분

 징후와 흔적 사이에서 나는

 열매가 아니라 핏자국을 본다

 

 찬란함에 가닿을 수 없는 자에게 눈부심은 참혹하다

 쌓는 것만큼의 힘이 무너뜨리는 데에도 필요하고

 봄 햇살 아래 꽃 핀 자리는 겨울이 지나간 자리다

 

 형형색색이라는 말의 난폭함이

 원색의 꽃들에는 복수심처럼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

 나는 살려는 자의 적의를 이해하면서부터

 악에 대한 의심을 버렸다

 

 내가 보고 있는 것은 벌떼들,

 피냄새를 맡고 몰려드는 피라니아들

 미망도 망각도 몸이 시키는 명령 앞에선 속수무책이다

 난분분 난분분 꽃들이야 난생처음 눈부시느라 바쁘지만

 

 꽃이 피었다는 사실을

 꽃이 지는 것을 보면서야 깨닫게 된다

 나는 탐색견의 코에 있는 그 눈으로

 멀리 달아나고 있는 것을 바라본다

 

 나무들이 무심하게 저녁을 건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