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승 - 연루

사무엘럽 2021. 1. 22. 09:05

 

친애하는 사물들:이현승 시집, 문학동네 생활이라는 생각 : 이현승 시집, 창비

 

 

 어느 날 모자가 천천히 자라나

 귀를 덮고 어깨로 흘러내리네.

 

 어느 날 신발이 천천히 늘어나

 무릎이 빠지고 허리가 잠기네.

 

 삶이 위대한 것은, 항상 가라앉고 있다는 것.

 가만히 있지 않고 조금씩 움직인다는 것.

 

 달의 인공호흡을 받고 죽은 것들이 깨어나네.

 차고 어두운 거울의 뒤편에서 몸을 일으키는 안개처럼.

 

 몸을 얻는 것은 언제나 삶의 문제인데

 의심은 죽은 나무 가지에 싹을 매다네.

 

 여름의 코는 겨울의 눈이 되어

 겨울의 눈은 여름의 코가 되어

 

 어쩌면 더이상 놀랄 것도 없는 세계에서

 바로 자신의 인기척에 놀란 사람처럼

 

 우리는 모자를 쓰고 구두를 쓰고

 완벽한 혼자가 되어 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