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희연 - 에프트

사무엘럽 2021. 1. 21. 22:31

 

여름 언덕에서 배운 것:안희연 시집, 창비 너의 슬픔이 끼어들 때 : 안희연 시집, 창비 밤이라고 부르는 것들 속에는:안희연 시집, 현대문학 당신은 우는 것 같다, 미디어창비

 

 

 나는 이곳의 포플러나무를 좋아합니다

 때로는 보랏빛으로 칭얼거리고

 때로는 선홍빛으로 얼굴을 붉히는

 

 저들과 눈 맞추고 있으면

 죽은 자는 서서히 생전에 그가 바라보던 나무로 변하고 있었다던

 어느 시인의 문장이 불현듯 이해되곤 합니다

 

 어느 밤 꿈엔 포플러나무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몸을 일으켜 에프트강 가로 나가보니

 나무마다 붉은 천이 묶여 있었습니다

 곧 나무들이 베어져 목재상으로 팔려갈 것이라고 하더군요

 

 나는 아직 그 나무들을 그릴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는데

 비록 내가 나무 너머를 그린다 한들 나무가 없다면 그게 다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나는 그 즉시 목재상으로 달려가

 얼마간의 시간을 얻어낼 수 있었습니다

 

 붓을 들었다 내려놓는 일이 계속되었습니다

 바람이 불 때마다 붉은 천이 무섭게 흔들렸습니다

 나는 이 불길을 멈출 길이 없는데

 그림 속으로 나무의 영원을 옮겨온다 한들 그것이 무슨 힘이 있겠습니까

 

 나는 내내 물컵에 담긴 귀를 상상했습니다

 그것이 모든 소음을 빨아들이도록 했습니다

 

 에프트의 포플러나무는 에프트에만 있다는 사실

 오늘의 포플러나무는 오늘의 색으로 빛나고

 유예된 죽음만이 내게 하루치의 물감을 허락하는 것이기에

 

 밤이 되면 포플러나무는

 온갖 색을 끌어안고 잠들어 있습니다

 불안과 평온을 오가며

 

 우리는 함께 이동 중입니다

 거울 속에는 아직 그곳에 도착하지 않은 내가 있고

 이곳의 나는 자꾸만 희미해져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