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희연 - 연루

사무엘럽 2021. 1. 21. 07:59

 

여름 언덕에서 배운 것:안희연 시집, 창비 너의 슬픔이 끼어들 때 : 안희연 시집, 창비 밤이라고 부르는 것들 속에는:안희연 시집, 현대문학 당신은 우는 것 같다, 미디어창비

 

 

 당신에게는 사슴 한마리가 있다 당신은 그 사실을 알지 못하지만

 사슴은 오래전 당신을 찾아왔고 당신 곁에서 죽을 것이다

 

 사슴은 색이 없고 무게가 없지만 자주 붉은 사슴이 되고

 며칠씩 사라졌다 돌아올 때가 많다 무언가를 찾아 헤매는 것 같다

 

 오늘도 사슴은 홀로 잡목 숲을 떠돌고 있었다 숲에는 하염없이 비가 내렸고

 이윽고 사슴은 덫에 걸리고 말았다 먼 곳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쇠구슬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린다

 그곳에 무언가 있다는 듯이

 처음이 아니라는 듯이

 

 그 순간 당신은 비에 대한 낯선 기억 하나를 갖게 된다

 소매엔 까닭 모를 흙이 묻어 있다

 

 덫에 걸린 사슴의 발이 검게 썩어들어갈 때

 당신은 수없이 지나다니던 방문턱에 걸려 넘어지고

 붉을 대로 붉어진 사슴이 절뚝이며 당신에게로 돌아올 때

 당신은 수백 개의 신발이 강물에 떠내려오는 꿈을 꾼다

 

 당신이 잠에서 깨어날 때 사슴은 빛 속으로 빨려들어간다

 당신은 그 사실을 알지 못하지만

 아침 햇빛을 보면 자주 무릎이 꺾인다 자꾸만 무언가를 잃어버렸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