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재 - 방의 미래

사무엘럽 2021. 1. 20. 08:32

 

목성에서의 하루, 문학과지성사 얼룩의 탄생:김선재 시집, 문학과지성사 노라와 모라:김선재 장편소설, 다산책방 누가 뭐래도 하마:김선재 소설집, 민음사 그녀가 보인다:김선재 소설집, 문학과지성사

 

 

 없는 것을 더듬는 밤이다. 이를테면 해안선을 따라 흘러가는 불빛, 불빛에 일렁이는 검은 물결. 줄에 묶인 검은 배가 혼자 기우는 그곳에 나는 없다. 다만 한 줄의 이야기가 밀려갔고 새로운 파도를 기다릴 뿐. 밀려가면 밀려오는 것을 알 뿐. 의자 위에는 읽다 만 책이 놓여 있다. 새가 날아오를 때마다 숲은 자욱해진다. 꽃이 떨어질 때마다 하늘은 멀어진다. 멀고 깊고 어두운 마음이 있다. 서랍에서 낡아가는 말이 있다. 할 수 없는 말이 있다. 슬픈 잠에 빠진 말이 있다. 밖에서 안을 찾아 헤매던 날들은 멀어졌다. 서로의 얼굴을 더듬던 날들을 기억한다. 단지 한 방울의 물을 떨어뜨렸을 뿐인데 우리는 끝없이 가장자리로 밀려간다. 언덕 위에는 깃발이 나부낀다. 있는 곳에서 없는 쪽으로. 보이는 곳에서 보이지 않는 쪽으로 불어가는 바람이 있다. 우리가 믿을 수 없는 것은 우리가 아니라 우리의 오늘이야. 각자의 길로 걸어가며 우리는 그렇게 말했다. 너의 등 뒤에는 가지런한 말들이 있다. 나의 앞에는 가지 못한 길들이 있다. 바람은 바라는 곳에서 불어온다. 버린 것도 버려진 것도 아닌 날들이다. 잃은 것도 잊을 것도 없는 시간이다. 읽다 만 책을 다시 펼치는 밤이다.

 

 달이 뜬다.

 까마귀가 날아오른다.

 개가 짖는다.

 

 시작도 없이 끝도 없이,

 

 방을 끌고,

 밤을 밀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