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재 - 담장의 의지

사무엘럽 2021. 1. 19. 07:10

 

목성에서의 하루, 문학과지성사 얼룩의 탄생:김선재 시집, 문학과지성사 노라와 모라:김선재 장편소설, 다산책방 누가 뭐래도 하마:김선재 소설집, 민음사 그녀가 보인다:김선재 소설집, 문학과지성사

 

 

 신발을 돌려놓으면 누군가 들어왔다 안에도 없지만 밖에도 없는 사람이

 

 우리가 발을 맞춰 같은 말을 되풀이할 때

 기대가 기대온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서

 

 안으로 나가려는 사람과 밖으로 들어가려는 사람이 서로를 밀어낼 때

 이제 막 시작되는 날씨

 

 좋다고 말하지 않아도 풍경이 쪼개진다면

 싫다고 말해도 괜찮을 텐데

 

 쓰는 순간 사라지는 구름과

 소리 내면 지워지는 물방울 사이에서

 

 공을 굴리는 아이들은 굴릴 만큼 굴리고 나서야 돌아갔다 다 자란 꽃을 주울 때마다 바닥이 드러났다 틈만 나면 틈이 되었다 속삭이기 좋았다

 

 그늘을 지운 담장도

 그늘이 되기에 좋고

 

 입술을 깨물면 배고픔이 덜하다고 했다

 깨문 자리마다 입술이 피어났다

 

 벽이 되는 손자국을 따라

 무성한 것들은 다 비밀이어서

 

 악수를 나누면 돌아서야 한다

 

 바깥이 아니어서 안으로 들어갈 수도 없는

 서로의 입술을 문질러 지우니

 

 고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