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재 - 부정사

사무엘럽 2021. 1. 19. 0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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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밖은 길고 안은 어두웠다

 

 누군가 길 끝으로 걸어가고 나면 그 끝을 오래 돌았다

 

 제 꼬리를 잡으려고 도는 개와 함께

 

 그것밖에 아는 게 없어서

 

 양달을 깔고 앉은 한때는 응달이 되고

 

 누군가 흘린 뒤통수에서 털실이 날린다 털실은 매듭을 짓기에 좋고 매듭을 진 다음에는 돌아설 수 있다

 

 골목을 주워 담는 바람은 내버려두고

 

 여기엔 물이 있고, 여기엔 딸기가 있고, 여기엔 차가운 아침 공기 속에 쥐 죽은 듯이 메뚜기가 앉아 있는데 얼굴이 자꾸 녹았다 녹으면 테두리가 없어질 텐데 내가 없어질 텐데

 

 새들도 땅에서 죽는다는 말을 다섯 번쯤 듣고 나면 중력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두 번이나 싫다는 말은 진짜 싫다는 말이다

 

 이제 남은 것도 없는데 조금씩 자루는 줄어들고 자루라고 중얼거리면 어쩐지 뭐라도 담아야 할 것 같아서 바닥이 천천히 무릎을 짚고 일어섰다

 

 쏟아진 그림자를 바라보듯 돌던 개가 돌아본다

 

 가만히 서 있거나

 아주 느리게 걸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