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혁 - 외올실

사무엘럽 2021. 1. 18. 02:38

 

소피아 로렌의 시간:기혁 시집, 문학과지성사 모스크바예술극장의 기립 박수:기혁 시집, 민음사 베개 3호, 시용 언.어.총.회, 테오리아

 

 

 1

 막다른 골목을 빠져나오며 보았던

 발자국 위 또 한 발자국

 초겨울의 숫눈 위로

 네발 달린 맹수가 뒤따라오고 있었다

 핏덩이 같은 고백을 송곳니로 깨물고

 허물어진 담장 밑

 배고픈 새끼들을 향해 가듯이

 당신을 기다리던 나를 앞질러

 개들이 짖어대던 청춘의 모퉁이를

 아침처럼 내달리고 있었다

 무수한 화살이 태초의 맹수를 겨누고

 더운 심장을 길들이기 위한 올무가

 시간을 잡아끌었지만 매번

 붙잡혀 온 것은 직립의 절뚝거림뿐

 하얀 입김을 내뿜는 살점과

 얼룩무늬 등허리의 촉감을

 어째서 상처도 없이 거두려 한 것일까

 

 2

 당신을 기다리는 동안 두번째

 막다른 골목에 고독이 갇히고

 나는 킬리만자로의 만년설까지 이어진

 긴 핏자국의 행렬을 고쳐 쓴다

 창문 너머 당신의 음영이 비칠 때

 슬픔은 마지막 발자국으로부터

 되돌아오는 것 앞코가 벌어진 운동화의

 무심한 본드 자국처럼

 곁을 내어준 자리엔 찌꺼기가 경계를 긋는다

 당신의 발치께에 눈이 쌓이면

 눈 때문에 디뎌야 할 봄날이 먼저 시리다

 떠나간 사랑을 아는지

 그것은 맹수가 맹수를 부르다 흘린

 눈물 속 내력이며

 결빙의 발을 감춘 야경이 포효하던

 홀로 선 인생의 뒷모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