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기혁 - 봄의 그라피티
사무엘럽
2021. 1. 17. 05:54
내용이 있는 여백은 순조로웠다
벽화를 향해 창을 던지는 고대인처럼
나의 사랑은 아직 문명을 모른다
빗나간 큐피드의 화살이 박힌 신촌 굴다리
아스팔트를 걷어낸 대지를 떠올리면
최초의 발자국들이 들소 떼를 쫓아 내달리고
동굴에서 태어난 아이는
4천 년째 참았던 침묵을 운다
담장 아래 버려진 스프레이 깡통엔 유독
노란색이 많았지만
서양민들레의 고민은 꽃말이 아니라
덧칠한 심장의 은폐에 있음을 헤아려야 한다
이름 붙이지 못한 뒷모습을 둘러보거나
둘러본 뒷모습의 생활을 유추하는 일조차
내게는 심장이 필요한 고통
헐렁한 청바지를 움직이는 어둠을 불온하다 이른 뒤에도
한 손을 쥐여준 여인에게
적당한 목소리를 들려주지 못한다
외로움이란 말을 모르던 시절,
의미 없는 한 줄 낙서를 적으며 눈물 흘릴 때
벽화를 뛰쳐나온 짐승들은 비로소 짝짓기를 시작하고 우리의
생애를 처음 만든 누군가
살아 있는 사슴을 어깨에 두른다
가자, 장미여관으로
비가 와도 씻기지 않는 절정을 쳐바르던 입술로
원시림의 복판처럼 신촌 로터리를 돌아본다
오늘 하루, 심장은 잊기로 하자
배역이 없는 배후들을
사랑하기로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