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지일 - 세잔과 용석 외 5편 (2020 경향신문 신춘문예)

사무엘럽 2020. 11. 11. 09:05

 <세잔과 용석>

 

 세잔의 몸은 기록 없는 전쟁사였다

 나는 용석을 기록하며 그것을 알게 되었다

 

 세잔과 용석은 호명하는 방법의 차이만 있을 뿐

 하나의 인물이었다

 

 나는 세잔을 찾아서 용석의 현관문을 두들기기도 하고 반대로 용석을 찾아서 세잔의 현관문을 두들기기도 했다

 

 용석은 빌딩과 빌딩의 높이를 가늠하는 아이였고

 세잔은 빌딩과 빌딩의 틈새를 가늠하는 아이였다

 

 세잔과 용석 몰래 말하려는 바람에 서두가 이렇게 길어졌다

 (세잔과 용석은 사실 둘이다)

 

 다시,

 

 세잔의 몸은 기록 없는 전쟁사였다

 나는 세잔과 용석을 기록하며 그것을 모르게 되었다

 

 세잔은 새총에 장전된 돌멩이였다

 세잔은 숲의 모든 나무를 끌어안아 본 재였다

 세잔은 공기의 얼굴 뒤에 숨어 있는 프리즘이었다

 

 용석아

 네게서 세잔에게로 너희에게서 내게로

 전쟁이 유예되고 있다

 

 용석아

 네 얼굴로 탄환이 쏘아진다 내 배후는 화약 냄새가 가득하다

 

 세잔과 용석은 새들의 일회성 날갯짓, 접히는

 세잔과 용석은 수도꼭지를 타고 흐르는 물의 미래, 버려지는

 세잔과 용석은 공중의 양쪽 귀에 걸어준 하얀 마스크, 아무도 모르는

 

 나는 누구를 위해 세잔을 기록하나

 용석을 기록하나

 

 도시의 모든 굴뚝에서

 세잔과 용석이 솟아난다 수증기처럼 함부로 

 

 

 

 <뻐꾸기가 들어갈 수 없는 제목>

 

 나의 뻐꾸기여

 무엇을 위해 그렇게 성실하게 울고 있나요

 

 밧줄이라고 읽을래 꽉 찬 빈 새장이라고 부를래 도르륵 열리는 지퍼 소리가 좋아 말할래 닦달닭 할래

 새벽 세 시는 거짓말을 떠올리기 좋은 시간

 

 구름은 천천히 몸을 벗기 시작한다

 창백한 겉 붉은 피 흰 뼈 다시 뼛속 어두운 공터... 차례대로 펼쳐질 동안

 나는 뻐꾸기의 이름을 상상하고 있었다

 의자 위에 서서 모르는 울음소리를 매일매일 연습했다

 외쳤다 질렀다

 

 어쩜 중요한 건 거리감

 화자와 청자 사이에 오가는 이야기는 어디까지 뒤틀릴 수 있겠나 서로가 암묵적으로 공유하는 범위 내에서 뻐꾸기는 이곳으로부터 몇 번 째 구름까지 날아갈 수 있겠나

 옆 방 아저씨는 제발 입 좀 닥치라며 쿵쿵 벽을 내리치고 

 

 뻐꾸기가 뻐꾸기를 닫고 뻐꾸기 국가로 뻐꾸기 하는 뻐꾸기는 수컷이 암컷보다 크니 작니 징글징글한 말들을

 낚아채서 꾹꾹 씹어 삼키는 뻐꾸기

 

 정각은 기울어 좋은 시간

 딛고 선 두 발이 공중에서 잠깐 흔들 의자와 의자 아닌 것들이 흔들 흔들 몸도 못 가누고

 

 나의 뻐꾸기여

 무엇을 위해 그렇게 성실하게 울었던가요?

 

 대롱대롱 매달린 발바닥과 바닥의 거리를 줄자로 재고 있는 뻐꾸기들이여 데굴데굴 의자 아래를 트랙 돌듯 굴러가는 둥근 알들이여

 닿을 듯 닿지 않을 듯 거리감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발이여

 

 거짓말처럼 열리는 입술

 내가 모르는 나의 뻐꾸기

 

 

 

 <초록 붉고 주황, 붉고 초록 주황>

 

 네 맞은편에서 너처럼 서 있었다 너는 단 한 번도 나를 바라보지 않았다 눈빛이 어긋나서 네게 들키지 못했다 끊임없이 속삭였다 초록 붉고 주황 배운 대로 네 눈빛을 암기했다 네가 흔들려서 내가 흔들렸다

 

 잠꼬대하며 흘린 구름들이 네 쪽으로만 미끄러졌다 배경은 저리 비켜나라 좌우로 물러나라... 너만 남고 모든 풍경은 사라지라 끊임없이 앙상한 척추만 남을 때까지 줄줄 몸이 녹아내리고 공중에 겨우 눈빛 하나 띄워놓을 때까지

 

 매일매일 읊조렸다 무성한 삼나무가 심겨 있던 자리로 빈 가지를 모자처럼 눌러 쓴 느티나무가 솟아났다 여름 여울 겨름 겨울 순서가 없었다 고층 빌딩 유리창 불빛이 반짝였다 너와 내가 마주 선 공중을 이해한 새들이 초록 붉고 주황 초록 붉고 주황... 울면서 빛났다

 

 오른쪽에서 왼쪽에서 네가 한꺼번에 태어났다 초록 붉고 주황 나는 너의 모습을 지우려 했다 남기려 했다 초록 붉고 주황 나는 정지된 빛 안에 서 있었다 건반 소리가 울려 퍼졌다 발자국... 내가 모르는 발자국 앵무새와 마우스 프라이팬이 우리 사이에 그려진 피아노를 밟으며 지나갔다 뚜벅뚜벅 소리를 지르며 건너갔다 내게서 네게로

 

 속삭였다 초록 붉고 주황 빠르게 번갈아가며 초록 붉고 주황, 하고 펼쳐졌다 세로로 빛을 가르고 한 아이가 나타났다 초록 붉고 주황 야금야금 초록 붉고 주황을 깨 먹으며 아이는 중얼거렸다 내 눈 속이 첨벙거렸다

 

 잠시 제 이야기를 할 테니

 너는 듣지 마세요

 여섯 살의 나 춤추는 훌라후프

 일곱 살은 디스코 팡팡

 여덟 살은 펼쳐진 다섯 살의 손바닥

 아홉 아홉 붉어 주황  초록

 

 너의 눈빛이 사방에 붉고 초록 주황 어떻게 읽어도 상관없는 빛처럼 붉고 초록 주황 아이가 멀어졌다 퉁퉁 거리에 울려 퍼졌다 둥둥 흰 건반 사이의 목소리 붉고 초록 주황 나는 가만히 들으며 붉다 붉어 붉음 붉고 초록 주황... 

 

 

 

 <말할수록 빵빵해지는 풍선>

 

 아아 즐거워요 귀는 말을 조금 더 즐기기 위해 만들어낸 기호품 풍선 밖에서 잠들고 풍선 속에서 깨어났어요 팔을 떼어다 새에게 물려줄 수 있고 아무것도 의심하지 않을 수 있어요 이곳이라면... 낙타 플라스틱 왜가리 호치키스... 중얼거리면 내가 사랑하는 음식들이 눈앞에 나타났어요 아아 뜨겁고 달콤한 냄새

 

 부풀어 올랐어요 손목과 발목이 몸에서 떨어졌어요

 오징어가 구름을 흔들고 있다 나는 방금 본 것을 말할 수 있어요 유영과 유영 그리고 다음 유영

 한 단어를 이만 갈래 빛으로 쪼갤 수 있어요

 말하는 모양을 끝도 없이 떠올릴 수 있어요 이를테면 고양이의 동공, 반으로 쪼개진 얼굴, 고리를 도둑맞은 토성

 

 그런데 덜컥 당신이 태어났어요

 풍선 밖에서 잠들고 풍선 속에서 깨어났어요 만다라 태양계 지글지글 장작 불씨 티끌... 중얼거리고 있을 때면 당신이 내 눈을 바라보며 꺄르르 웃어요 내 입을 가리키며 자지러져요

 

 말을 줄였어요 줄이고... 줄이다가

 몸을 잃은 구름처럼 바람이 알려주는 대로 휘날렸어요 대답만 배웠어요

 네, 글쎄, 아닙니다

 (그동안 흘려보냈던 말들이 바람을 타고 회오리쳐요 한꺼번에 밀려와요)

 네, 글쎄, 아닙니다

 (벽에 부딪혀 돌아와요 회오리 몸피가 점점 불어나요)

 

 온몸에서 풍기는 따뜻한 침 냄새... 누군가 이 아름다운 세계를 끝장내려나 봐요 당신께 물었어요 어쩌려고요? 어쩌려고요 당신이 내 말을 따라하며 꺄르르 웃어요 바닥에서 자지러져요 나를 바라보는 당신을 내가 바라보며 꺄르르 웃어요 먼 곳에서... 아니 아니요 가까운 곳에서 바람 빠지듯 말 빠지는 소리가 숨숨숨... 

 

 

 

 <지극히 의미 없는 문>

 

 문을 연다 쏟아지는 뿌연 빛 - 

 그 속에 내가 서 있는

 

 글쎄, 저 장면이 상영될 때 나 살짝 졸고 있던 참이었고요

 

 조명이 켜진 영화관

 서둘러 빠져나가는 발목을 불러봤어요 붙잡아봤어요

 우리 그냥 사는 이야기나 해요

 

 저 문 바깥에 대해서

 푹신한 양모 카펫이 깔려 있는 복도 비상구 유도등 우수수 떨어진 팝콘과 이를테면... 지금 막 변기 레버를 내리는 사람에 대해서

 

 몸에서 오려 낸 발목이 하나 둘 의자에 앉는다면

 한쪽에서 손과 발을 목과 어깨를 차곡차곡 쌓아올리고 있다면 다른 한쪽에서 문 하나가

 

 마음의 문이요? 글쎄, 그런 것이라면... 세상 모든 문들은 미닫이와 여닫이로 설명 가능하지 않던가요

 

 문 열리고 - 해변이나 숲 구름 위를 미끄러지는 새떼가 등장하는 풍경 따위 - 문 닫히고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는데요? 통유리문은 한 손으로 밀어 젖히기가 무겁고 온몸으로 밀어본다 하더라도 반대편에서 바람이라도 세차게 부는 날이라면 도무지...

 정이란 정은 다 떨어지는 법인데요

 

 그러니까... 당번과 우유 박스를 한 쪽씩 나눠 들고 걷는 복도예요

 넘어진 너와 내가 있었고 터지는 우유갑 후르르 쏟아지는 우유를 모두가 바라보고 있을 때

 우리는 복도보다 더 힘없는 단어 같아요

 자빠진 채 빠르게 날개를 펼치고 사라지는 풍경의 풍경 같아요

 

 쏟아지는 빛을 느끼고 싶다면 스위치를 누르거나 올리거나... 화창한 바깥이 펼쳐진 날을 골라 외출하세요

 

 다음 영화의 중요한 장면은 문이 가로막고 있는 문 너머의 세계 그러니까... 기쁨에 취한 개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곳

 

 이제 그만 나갈게요 네네 나 복도와 복도를 슬쩍 막고 서 있을 테니 가벼운 문처럼 가벼워서 문 아닌 문처럼 어쩌면 가벼워서 문에 가까운 문처럼요 

 

 

 

 <눈 내리는 밤이었는데요>

 

 어떤 침대에서는 꿈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죄인이 되었다

 

 창가에 서서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네 뒷모습

 폭설이 가로등 불빛처럼 쏟아지고 있다 거리에 눈사람처럼 박제된 사람들이 보인다

 

 나는 창밖의 흩어지는 눈발과 불빛을 구분할 수 없다

 방금 일이다

 

 거리는 조용하다

 눈사람과 눈사람 그리고... 조금 더 큰 눈사람이 사람처럼 거리에 서 있을 뿐

 

 지금 새벽은 독보적이다

 중얼거리는 네 목소리는 눈과 도시의 마찰음 때문에 잘 들리지 않는다

 

 읽다 만 책처럼 접어놓은 꿈이 베개를 따라 흘러내리고 있다 나는 내 꿈을 상상한다

 

 침대는 아무도 모르게 혼자서 영역을 확장한다

 이것은 너와 별개의 사건이다

 

 창가에는 아무도 없다

 창문을 통과해 끊임없이 방 안으로 쏟아지는 폭설

 

 나는 눈 내리는 풍경과 네 뒷모습을 구분할 수 없다

 방금 일이다

 

 확신 없이 머리를 감싸는 베개의 허술함이 좋다

 빗나간 추측 앞에서 나는 가볍게 녹고 성의 없이 단단해진다

 

 새벽을 머릿속에 나눠 담는 일

 흔들흔들 침대 

 

 

 

 <당선 소감>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을 말이라는 것으로 상대에게 전달하는 것이 퍽 힘들었습니다. 대화 도중 더듬기 일쑤였고, 네, 글쎄요, 그러게요, 같은 짧은 말들을 주로 내뱉었습니다. 뱉지 못한 것들은 빠르게 사라졌습니다. 누군가 훔쳐간 물건처럼 제 것이었으나 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을 글로 옮기는 것은 더욱 힘들었습니다.

 누군가 그랬습니다. 신인은 패기가 있어야 한다고, 당선 소감에 앞으로의 방향성을 적음으로써 자신을 드러내야 한다고. 저는 패기 있게 전진하는 것보다, 옆과 뒤를 살피며 걸음을 옮기는 것이 좋을 뿐인데요. 방향성 같은 거창한 것을 쓰기에는 이곳보다는 일기장이나 메모장이 더 어울리지 않을까. 그런 생각뿐입니다.

 아무래도 제게 시하기의 이유는 재미였던 것 같습니다. 시라는 것은 제게 경전도 아니었고 성서도 아니었고... 일종의 부채감 같은 것은 더욱 아니었습니다.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훨씬 많은 제게 시하기는 즐거운 행위였습니다. 정상성이라는 무서운 허구를 자꾸 들이미는 세계는 이상해 보였고 또 어찌어찌 세계라는 것이 굴러가고 있다는 것. 그것은 더 이상해 보였습니다. 

 그러니 제가 아는 것은 어떠한 것도 모르는 저밖에 없다는 것. 그런 나와 함께 순간들을 잠시 붙잡는 것, 그곳에서 뛰어노는 것. 그런 것들이 재미있었습니다. 꾸려지는 찰나의 세계에 저를 잠깐 비집어 넣는 것이 즐거웠습니다. 아무런 소용도 없는 것이었더라도 말입니다.

 재미있게 써보겠습니다. 과감하게 놀아보겠습니다. 이름 없는 이름들과 함께 순간을 붙잡고 있겠다고, 믿어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