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안희연 - 백색 공간
사무엘럽
2021. 1. 12. 00:29
그 방에선 나무가 자라고 있다
온 몸이 뒤틀린 나무가 온몸을 비틀며 자라고 있다
몸속에 갇힌 태양
찬란했던 물의 기억을 태우며
겁에 질려 뒷걸음질 칠 때마다 시퍼런 이파리가 돋아났다
나는 황급히 문을 닫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쳤다
자물쇠를 가지고 그곳으로 갔다
방 안에는 웅크린 나무가 있다
곤한 잠에 빠진 거인처럼
벽을 움켜쥐던 손을 거두어 가슴팍에 얌전히 모으고 있다
물도 햇빛도 없이
침묵이 고이면 얼마나 깊은 두 눈을 갖게 되는지
나는 문을 걸어 잠그려다 말고
얼굴이 잘 보이는 높이에 작은 채광창을 그려주고 돌아왔다
나비를 보는 날이 많았다 창틀을 매만지면 밤이 왔다
발만으로는 갈 수 없는 깊은 골목
눈을 뜨면 문턱을 넘고 있었다 새로운 모퉁이를 돌 때마다 가지 말라고 손짓하는 아이들이 보였다
바람에 눈동자를 긁히며 그곳으로 갔다
온종일 입을 굳게 다문 날에는 물속에 잠긴 나무가
울면서 칼을 꺼내든 날에는 제 손으로 가지를 전부 부러뜨린 채
떨고 있는 나무가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