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안희연 - 뇌조
사무엘럽
2021. 1. 11. 05:36
흰 종이가 설원이 되어 깊어가고 있었다
내게 왜 이런 시간이 도착했는지 생각하느라 창밖이 어두워진 줄도 모르고
들여다본다는 건 참 가파른 일이구나 우리는 조금 더 부드럽게 휘어질 수 있겠구나 빛에 휩싸인 손으로
흰 눈 위로 흰 눈이 내리는 시간을 쓰다듬었다 천장의 접시들이 흔들렸다
불을 켜지 않았는데 어둡지 않았다 나는 밤의 한가운데에 도착해 있었다 초인종 소리를 들은 것 같아서
잠시 자리를 비우고 돌아왔을 때 의자는 눈 속에 묻혀 있었고 종이에 흐릿하게 적힌 글씨가 보였다
"뇌조는 극지방의 고산 지대에서만 발견되며 포식자인 북극여우를 피해 눈 속에 굴을 파고 살아갑니다."
목소리는 목 안에 없는데 어디서 오는 것일까
나는 몸을 찢고 날아오르는 일과 아름답게 파묻히는 일을 상상했다 고개를 들자 눈앞에 북극여우가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