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균 - 우유를 따르는 사람 외 4편 (2020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

사무엘럽 2020. 11. 11. 06:56

 <우유를 따르는 사람>

 

 창가에 앉아 우유를 따르고 있었다. 당신은 조용히 그것을 따르고 부드러운 빛이 쏟아졌다. 둘러맨 앞치마가 하얗고 당신의 얼굴이 희고 빛이 나는 곳은 밝고 빛이 없는 곳에서도 우유를 따르고

 

 우연한 기회에 인사를 건네고 거기에서 우유를 따르고 다름 날에도 성실하게 우유를 따르는 그런 사람에게 매일 우유를 따르는 게 지겹진 않나요, 그곳은 고요하고 그곳에서 당신을 계속 지켜보기로 하고

 

 어떤 날엔 TV를 켰는데 우유를 따르는 당신이 출연한다. 책에서도 우유를 따르는 당신이 등장한다. 당신이 앉아 있는 지면에 부드러운 빛이 쏟아지고 서가가 빛나고 읽던 것을 덮어도 빛나는 창가에서 우유를 따르던 당신이

 

 우유를 따르고 있었다. 여기서 우유를 마시는 사람도 없잖아요, 그런데도 차분하게 우유를 따르고 열 번을 쳐다보면 열 잔이 되는 우유가 있다. 실내는 눈부시고 새하얗게 차오르는 잔이 가득해지고

 

 그런데 누가 우유를 옮겨요, 지켜봐도 우유를 옮기는 사람이 없는데 우유를 가져다준 적이 없는데, 당신도 환하고 실내도 환하고 당신이 우유를 계속 따라서 그런 거잖아요. 문밖에서 발목이 젖고 우유가 넘치고

 

 우유가 흐르는 골목이 차갑고 당신은 계속 따를 수 있겠어요, 당신의 손이 새것처럼 빛나고 있었다. 

 

 

 

 <꽃집에 대해서>

 

 거리에 아주 많은 게 폈고

 그중에 한 가지를 골라 얘기하자 말한다.

 

 변하지 않는 얘기를 하고 싶었는데

 아주 많은 것들 틈에서

 한 가지 변하지 않는 사실을 말하는

 여기가 꽃집이었다.

 

 꽃집에는 여전히 아주 많은 것들이

 피어 있고

 그중에 한 가지를 골라서

 너에게 건네주는 순간에도 우리가

 꽃집에 머물렀으며

 

 꽃집에서 우리는 이제

 변하지 않는 걸 골라서

 시들지 않는 꽃이라면서

 신기하게 서로를 쳐다보았다.

 

 행인들은 이제 시들지 않는 꽃에

 관심이 없고

 시들지 않는 꽃을 들고 거리로 나왔는데

 오래 걸어 도착한 골목에 이르러서

 

 아주 많은 것들 가운데 피어 있다고 말하는

 여기서부터 꽃집이었다. 

 

 

 

 <새장>

 

 여기서 날아가지 않는다고 한다 멧비둘기 한 쌍이 종일 앉아 있다고 한다

 

 거기서는 날아간다고 한다 멧비둘기 한 쌍이 나무 위로도 빌딩 사이로도 날고 있다고

 

 똑같은 멧비둘기라고 멧비둘기가 없으면 안 된다고

 

 멧비둘기를 부르면 사람들이 모두 멧비둘기를 쳐다본다 아픈 멧비둘기 같은 건 없다고

 

 주인이 말한다 멧비둘기 주인 같은 건 처음 듣는다고

 

 멧비둘기 한 쌍이 난다고 해서 꼭 멧비둘기가 날아가는 건 아니라고

 

 멧비둘기를 닮은 새가 날고 있다고

 

 멧비둘기 한 쌍이 앉기도 한다고 거기서 날아간 여러 가지 새가 여기로 들어온 거라고 한다

 

 정말로 사라졌다고 한다 멧비둘기를 기르는 사람은 따로 있다고 없으면 정말 큰일이 난다고

 

 멧비둘기가 그저 그런 사람은 멧비둘기를 그만 쳐다보고

 

 날아간 자리를 채우려고 멧비둘기가 멀리서 날아온다고 한다 

 

 

 

 <종이집>

 

 벽돌로 쌓아올린 집이 있었고 그는 벽돌을 세고 있다고 했다 그는 붉은 벽돌과 검붉은 벽돌을 구분한다고 했다 붉은 벽돌 2,839개 검붉은 벽돌 482개라고 전했다 195개의 높이로 쌓아올린 집이었고 층고가 높은 3층이라고 했다 그것이 이 집의 정면이고 틀림없다고 했다

 

 그는 벽돌 감별사가 되었다 벽돌로 지어진 집을 세는 게 일이었다 개중에는 가짜 벽돌도 있었다 그는 그것을 구분할 줄 알았다 동네에는 79개의 벽돌로 지어진 집이 있다고 그중에 세 집이 부서지고 다섯 집이 새로 생기고 두 집은 리모델링되었지만 데이터는 쌓였다 데이터에는

 

 벽돌로 지어진 집이 제일 많은 동네가 기입되었다 벽돌로 지어진 집이 한 군데도 없는 동네가 추려졌다 벽돌로 지어진 상가는 포함하지 않은 숫자였다 감별사가 더 필요했다 지망생이 생겼다 목덜미를 주무르다가 포기하는 사람이 늘었다 학원을 나오면서 벽돌을 헷갈리지 않고 세는 건 어렵고 힘든 일이라 했다 재능과 적성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고 이달의 감별사가 말했다

 

 건축가는 벽돌을 세는 감별사가 한심했다 그러면서 벽돌을 쌓아올리는 미장공에게 벽돌을 몇 개 사용했는지 미리 세어보라고 지시했다 미장공은 벽돌을 세다가 귀찮아서 벽돌을 운반하는 인부에게 대신 부탁하고 벽돌을 제조하는 사람도 슬쩍슬쩍 벽돌을 셌다 이번 달에는 몇 개의 벽돌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몇 개의 벽돌이 없어졌습니다 벽돌로 지은 다채로운 집이 산출되었다 통계연감이 도서관에 비치되었다 그전에

 

 통계연감을 감수하는 사람이 생겼다 감수자는 맨 처음 벽돌을 세던 그였다 그는 벽돌 대신 연감을 넘기며 숫자를 다시 세어보고 있었다 막대그래프 높낮이를 검토했다 벽돌을 세지 못해서 슬픈 얼굴이었지만 그는 최초의 벽돌 감별사로 기록되었다 둘둘 둘셋, 벽돌이 늘어선 골목을 빠져나오며 손가락을 치켜든 모습도 신문에 실렸으므로 그는 신문을 가져와서 인쇄된 골목의 벽돌을 차분하게 세기 시작했다 

 

 

 

 <그는 이게 무슨 말인지 안다>

 

 책을 고르고 있었는데 그에게서 연락이 온다

 

 그는 여행을 떠난다고 한다 가기 전에 한번 보자고 한다 먼저 간다고 돌아와서 보자고 저녁을 먹고 있다고 밥을 다 먹고 나면 시간이 남는다고

 

 조금 전에도 여행을 간다 말하고 그러니까 떠나기 전에 꼭 한번 보자 돌아와서 차를 마시자

 

 여행 중이었고 그가 생각나고 저녁을 먹을 때 그가 없어서 그는 어딘가 걸어가는 중이다

 

 그는 이게 무슨 말인지 안다 떠나기 전에 만나고 돌아와서도 만나고 저녁을 먹은 다음엔 그다음엔 정말 손을 흔들고

 

 하염없이 고르고 있었는데

 

 커다랗고 작은 활자들 서로 다른 제목들 가지런한 책등을 채우고 있다 그는 이게 무슨 말인지 안다

 

 이제 짐을 꾸려야 한다고 말한다 짐을 챙기고 나서 시간이 없다 말한다 무수한 책이 꽂혀 있고

 

 무진하게 펼쳐질 것이다 그는 그걸 아주 잘 안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여행 중이다 그와는 사뭇 다른 여행 중이다

 

 책을 고르고 있고 그건 모두가 한 번 해봤던 일이다 지금 하고 있는 일이다 그는 이게 무슨 말인지 안다 

 

 

 

 <밖으로>

 

 너는 체크무늬가 잘 어울리는 얼굴 그래서 지난주에 체크무늬 목도리를 사줬어 체크무늬 목도리랑 어울리는 코트를 선물하고

 

 어떤 걸 먼저 입을까 너는

 

 문을 열고 들어온 너에게 체크무늬가 없어서 당황스러운 거 있지 우리가 앉은 테이블이 조금 더 즐겁게 설치될 수 있었을 텐데

 

 잘 어울렸을 텐데

 

 여기엔 무늬가 안 보인다 시도 안 보이고 시인도 안 보이고 창문이 가려진 곳이다 갈망이 없는 여기에서

 

 너는 지금도 체크무늬가 제일 잘 어울리는 얼굴 그래서

 

 체크무늬 목도리나 그날 산 코트에 대한 이야기로 되감기고

 

 여기는 스타일이 없다고 말한다 너는 화가 난 것 같다 선물한 체크무늬 생각한 체크무늬 그런 걸 입은 사람이

 

 없다고 말한다 나를 보는 네가 있고 너를 보면서 체크무늬를 상상하거나

 

 너는 이제 말이 없다 화가 많이 나 있는 것 같다 이것에 대해 할 말이 떨어졌다고 한다

 

 체크무늬를 입은 사람이 아직도 들어오지 않고 범연하게

 

 끝이 난다 화가 난 네 얼굴 거기엔 뭐가 어울릴까, 스타일이 없다고 대답하는 네가 나와 머무는 여기에서

 

 지금 당장은 체크무늬가 떠올라서 나는 무슨 말을 해야 될지 모르겠어, 나는 재생되고 그러니까 그만

 

 밖으로 나가자 

 

 

 

 <당선 소감>

 

 지하철이었다. 거기서 이름을 들었다. 몇 가지 질문과 답변이 오가고 처음 듣는 목소리로부터 축하한다는 말을 들었다. 어제는 호명되지 않았지만 오늘은 그렇게 되었다. 이것도 삶이다.

 지금보다 더 어렸을 때, 시가 꼭 내 것만 같았다. 어느 날부터는 시가 나보다 나았다. 시를 쓰고 거기서부터 떠나는 게 좋았다. 또 어느 날엔 시가 나보다 훨씬 더 나았다. 노란 옥스퍼드 노트에 또박또박 써내려갔다. 거기에 살고 있는 기분 같은 게 있었다. 더 이상 노트에 적지 않고 타이핑을 했다. 어느 순간에는 손가락에서 무언가 흘러나오는 것도 같았다. 거기에 삶이 있는지 없는지는 모르겠다. 상관이 없다. 초대 받은 시도 그렇게 나왔다. 앞으로도 즐겁고 외롭고 무지한 일들이 펼쳐질 것이다.

 

 

 

 <심사평>

 

 짧지 않은 논의 끝에 결국 우유를 따르는 사람을 당선작으로 고르기로 결정했다. 일상을 이야기로 벼리고 여기에 재기를 담아 삶에 대한 일반적 인식을 흔드는 힘을 지니고 있는 작품이었다. 가상과 가정의 세계를 덧붙여 무늬를 짜는 솜씨가 일품이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예사로워 보이는 비범함을 기대하게 하는 작품들이었다. 당선을 축하하며 더 큰 성취를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