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문자 - 얼룩말 감정

사무엘럽 2021. 1. 10. 0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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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가 된 그를

 북쪽으로 가는 거친 파도 위에 뿌렸지만

 

 그는 익사하지도 떠오르지도 않았다

 

 죽음은 아무래도

 내게 잘못 보내주신 낯선 짐승

 

 도심 어느 골목에 멍하니 서 있는 얼룩말 한 마리

 

 그가 없는 밤이 가면

 밤이 왔다

 전혀 다른 내일이 살아서 걸어왔다

 

 우리만 모두 살아 있는 새벽

 내다 버린 유품들이 비를 맞았다

 

 죽음은

 한 장을 넘기면 또 한 장의 털이 다른 가슴

 

 무턱대고 퉁퉁 불은 후회의 조합들

 

 얼룩말의 감정을 만드는 모조 같은 하양과 검정

 부스럭거리며 살아서 온다

 

 전에는 닳도록 시만 썼는데

 시에서 한 사람을 빼는 일

 

 안 보일 때까지 깜빡거리는 흑백의 잔등이다

 

 검었다 하얘졌다 하는 심장 사이

 하는 수 없이 숫자로 가는

 눈물투성이 초침 사이

 

 내일 켜지는 불빛은 또다른 검정

 

 내가 아닌 그도 아닌

 이것은 어떤 잠일까

 

 스칠 때마다 슬픈 소리가 났다

 

 세상은 언제부터

 나를 마구 읽어내는 격렬한 독자가 되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