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린아 - 돌의 문서 외 5편 (2018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

사무엘럽 2020. 11. 11. 00:04

 <돌의 문서>

 

 잠자는 돌은 언제 증언대에 서게 될까?

 

 돌은 가장 오래된 증인이자 확고한 증언대야. 돌에는 무수한 진술이 기록되어 있어. 하물며 짐승의 발자국부터 풀꽃의 여름부터 순간의 빗방울까지 보관되어 있어.

 

 돌은 한때 단죄의 기준이었어.

 비난하는 청중이었고 항거하는 행동이었어.

 

 돌은 그래.

 인간이 아직 맡지 못하는 숨이 있다면 그건 돌의 숨이야. 오래된 공중을 비상하는 기억이 있는 돌은 날아오르려 점화를 꿈꾼다는 것을 알고 있어.

 

 돌은 바람을 몸에 새기고 물의 흐름도 몸에 새기고 음푹한 곳을 만들어 구름의 척후가 되기도 해. 덜어 내는 일을 일러 부스러기라고 해. 하찮고 심심한 것들에게 세상 전부의 색을 섞어 딱딱하게 말려 놓았어. 아무 무게도 나가지 않는 저 하늘이 무너지지 않는 것도 사실은 인간이 쌓은 저 딱딱한 돌의 축대들 때문일 거야.

 

 잠자던 돌이 결심을 하면 뾰족했던 돌은 뭉툭한 증언을 쏟아 낼 것이고 둥그런 돌은 굴러가는 증언을 할 거야.

 

 단단하고 매끈한 곁을 내주고 스스로 배회하는

 돌들의 꿈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없이 굴러다닌 거야.

 아무런 체중도 나가지 않을 때까지. 

 

 

 

 <언니의 거위>

 

 거위에게 집을 맡겨 놓고 언니는 집을 나갔다. 거위는 목을 빼들고 악다구니를 쓰던 언니의 관계들처럼 순결했다.

 

 거위의 깃에는 붉은 달 끝이 묻어 있었다.

 

 거위는 발등에 붙은 체크무늬 스타킹 나무 이파리 같은 발자국으로 마당을 질퍽거렸다. 푹푹 끓어 대는 뽀얀 연기처럼 언니의 물장구가 가물가물 솟구쳤다. 거위는 마당 한편에 놓인 탐스러운 장독대를 휘휘 감았다. 지난 달 날아간 언니의 부리가 그리웠으므로 둔탁한 부리를 치켜들고 곰살궂게 퍼덕거렸다.

 

 날개도 없이 구름이 날아가는 것은 바람을 이해하는 일과 바람의 이동 속도다. 거위는 팔짱에 낀 구름을 흘려 보냈다. 오늘은 높이 날 수 있을까 물을 뒤집어쓸까 털을 두껍게 만들까 날개 뼈의 속신은 거위의 번드치는 깃에도 날씨와 바람을 만들어 냈다.

 

 나는 날개 달린 물고기를 그려 놓은 언니의 화분 옆에 앉아 언니를 기다리기로 했다.

 

 문득 어젯밤 밤눈을 푸덕이던 프로이센 기사단의 거위 뼈가 생각났지만 양쪽으로 날갯깃을 저울질하는 거위의 겨드랑이를 보며 생각도 돌연 뻐근해졌다.

 

 거위는 고상한 날개깃의 하얀 곡선 방향으로 까슬까슬한 바람의 인사에도 꾸덕꾸덕 울어 댔다. 오늘은 달려가지도 쫓지도 않는 거위의 물갈퀴가 언니의 파우치에서 새어 나온 콧바람에 뿌뿌거렸다. 

 

 

 

 <여름 공연>

 

 우리는 불가능을 담보로 공연을 계획했다.

 

 무대는 벌판이어도 좋고 지평선이어도, 간이 정류장 또는 당근밭이어도 좋았다. 중간에 무산된다 해도 우리의 목표는 사실, 거기까지였음을 주제로 공연을 했다. 빈 의자가 있는 데면 어디라도 좋았다.

 

 빈 의자는 눈치가 빨랐고 반딧불이들은 뒷날을 밝히며 또 소모하여 날았다. 팔걸이가 없는 의자는 좌석 번호도 없었지만 관객들은 미안한듯 자신들의 눈치를 봤다. 단원보다 더 적은 관객들 앞에서 노래를 불렀다. 빈 의자가 시끄러워지면 우리는 별자리들의 음계를 슬쩍슬쩍 틀리곤 했다.

 

 바퀴 자국은 꼭 비가 내린 날에만 지나갔다. 우리는 그 바퀴 자국에 공연 홍보를 부탁하기로 했다. 저 바퀴 자국은 사람이 많은 곳으로 갈 것이니까.

 

 탁구대를 가져다 놓았다. 둥근 것으로, 새의 염통, 개의 꼬리, 튼튼한 슬개골을 튕겨 올리며 대사를 주고받는 게임을 했다.

 

 핑퐁, 핑퐁,

 

 가끔은 내가 보낸 소식들이 휘어져 돌아오거나 돌아오지 않았다.

 

 조연들은 솜털 같은 벨벳풍 저녁 어스름을 좋아했다. 중견들은 괄호쳐진 웃음을 좋아했다. 커튼콜이 없는 나비들이 장식처럼 날아 대는 여름이 오른쪽 발과 왼쪽 발에서 번갈아 날아올랐다. 해바라기 속에서 나온 까만 조명엔 병든 얼룩처럼 먼지가 떠다녔다.

 

 이빨보다 말이 먼저 빠진 여름, 우리는 양치식물처럼 한 무대에서 춤췄다. 구름을 비닐봉지에 담고 강의 여울들과 나눈 인터뷰는 늘 들떠 있었다.

 

 그리고 장마.

 우리들은 연기된 공연에서 쑥쑥 자라는 잡풀을 뽑거나 각자 자신들의 배역 속으로 허우적거리며 침잠해 들어갔다. 

 

 

 

 <실루엣>

 

 실루엣은 관대한 목격

 말 보러 간 남자는 뒷모습이 가깝고

 꽃 보러 간 여자는

 아지랑이를 누는 듯 가물거린다.

 

 부끄럽지 않은 거리

 들판에서 멀어질수록

 내외를 벗어난 앉은 꽃과

 서 있는 목축은

 흐릿한 장막이다.

 

 가시의 확보는 산들바람과 시큰한 콧등과 축축한 발바닥, 차가운 볼에 발그레 떠 있는 푸른 하늘을 숭배하는 가축의 안부다.

 

 댁의 양은 살도 토실토실 오르고,

 새끼도 잘 낳고, 젖도 잘 나오지요?

 구부러진 활로 인사하는 목격자들은 허리끈을 주고받는다.

 서로의 끈을 돌려받는 계기로

 상대방의 팔을 포개는 일

 

 댁의 양털이 비단처럼 부드러워지길 바랍니다.

 

 훈기가 도는 장작 난로 위 대지의 잠

 모르는 사람은 벌하지 않는 미끄러운 아지랑이

 가축과 가족의 안부의 간격

 

 포옹과 뺨의 사이

 흐릿해지는 거리에서 섞여 버린

 꽃 보러 간 여자와

 말 보러 간 남자

 

 분간하기 어려운 모자의 높이는

 만지기엔 어스름한 햇볕의 거리 

 

 

 

 <악천후>

 

 부부가 덜컹거리는 좌석에 앉아

 각자의 잠에 든다.

 저것은 개인적 시간

 정수리에서 한 뼘 거리

 비스듬히 고개가 기울어지거나 팔짱을 낀

 몇 십 년은 한 침대를 써 왔을 부부의

 옷 입은 꿈은 지극히 개인적 시간으로 덜컹댄다.

 팔짱을 낀 여자는 찡그린 악천후고

 남자는 두 손을 가지런히 올려

 미간을 모은 경청하는 자세다.

 익명의 자세와 예고 없는 날씨.

 다정한 생시를 벗어나자마자

 악천후를 견디고 있는 여자와

 역시 악천후를 견디고 있는 남자가

 벽면에 한 벌의 재킷을 걸어 두고

 끝단이 잘려나간 체크무늬 담요를

 좌석 팔걸이에 흘려 놓은 시간.

 눈가 주름 사이에 낀

 곱슬머리 여자의 구부러진 머리칼

 양 갈래로 쳐진 아랫입술을 덮은 니트

 이것은 어떤 사모의 자센가.

 머리가 센 남자의 이마가

 창가의 남자를 자주 마주칠 때

 턱이 쇄골에 닿고

 기울어진 골반의 무게

 흔들리는 어깨는 피곤한 여정을 흐느끼는 중일까

 달리는 그림자를 등에 깔고

 온몸에 걸친 옷자락과

 각기 다른 방향을 향해 빛나고 있는

 구두코가 꾸는,

 덜컹거리는 악천후들. 

 

 

 

 <찰나>

 

 모든 힘이 다 빠진 손 하나를 본다.

 저 손바닥 위로 백년마다 한 번씩 꽃이 떨어지고

 그 꽃을 힘껏 쥐었던 횟수로

 일생의 봄이 다 소진되고 만 손.

 

 봄 산의 모든 꽃을 다 쥐었다 놓은 손이

 늙은 손사래를 치는 시간.

 일생의 다정을 다 만지고 간 손.

 세상의 모든 숫자를 다 합하거나 빼고

 온갖 공중을 다 휘젓는 악몽의 차례를

 다 거치고 간 손.

 손바닥과 주먹은 원한과 또 다정을 오고간 저 찰나의 순간.

 눈뜬 순 마지막 숨을 쉰 식이 모여

 순식간이라 한다면

 손바닥은 셀 수 없는 시간이 쥐락펴락한 증거다.

 움켜쥐거나 놓아 버린 일들이

 아무 경계 없이 손바닥 안으로 흘러든다.

 세상에 와서 이식한 손들이 많았다.

 마지막 순례를 거치듯 발상의 말초에 다다른

 분침이 시침을 다 따라잡은 때

 겹쳐 놓은 꽃가루가 뱉어 낸

 무수한 영원을 놓은 손바닥.

 

 습의 끝을 누른 손톱 밑

 거뭇하게 자란 찰나의 그림자를 보았다. 

 

 

 

 <당선소감>

 

 가치와 쓸모없음은 분명 어떤 상관이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쓸모없는 일을 하고 있다고 들은 핀잔들이 오늘, 이렇게 기쁜 일이 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또 인간의 존엄이란 지속 가능한 현재에 있다는 언젠가 누구에게 들은 충고도 이해가 되는 순간입니다.

 한때 나는 나와 타자 사이를 화해시키려 애썼던 일도 있었음을 고백합니다. 불화를 다독이다 시를 알게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시를 보이고 들었던 악평들에게 감사합니다.

 뮤지컬 무대에서 수백 번 읽고 외웠던 가사들이 어느샌가 노래로 쏟아져 나올 때, 붕붕거리는 노래들이 다 빠진 그때까지도 여전히 남아 있던 것들이 시는 아니었을까 하고 의심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나는 내 의심들을 믿습니다. 화려한 무대보다 공연이 끝난 무대의 쓸쓸함이 저에게는 시였습니다. 노래들은 나에게 이율배반이라고 힐책하고 시는 주눅이나 챙기라고 또 힐책했었습니다. 이제 양립으로부터 그 쌍방으로부터 조금은 당당해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심사평>

 

 당선작 돌의 문서는 진실한 증언이 요구되는 이 시대의 이야기로 읽힌다. 침묵을 옹호하는 시대에서 침묵의 증언을 요구하는 시대로 전환돼야 한다는 것이 시 전체를 관류하는 정신이다. 기시감이 느껴질 정도로 안정적이어서 신인답지 않다는 것이 단점이지만, 당선자가 돌에 새겨진 문서의 구체적 내용을 앞으로 두고두고 시로 쓸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