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은지 - 정말 먼 곳 외 5편 (2018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
<정말 먼 곳>
멀다를 비싸다로 이해하곤 했다
우리의 능력이 허락하는 만큼 최대한
먼 곳으로 떠나기도 했지만
정말 먼 곳은 상상도 어려웠다
그 절벽은 매일 허물어지고 있어서
언제 사라질지 몰라 빨리 가 봐야 해
정말 먼 곳은 매일 허물어지고 있었다
돌이 떨어지고 흙이 바스러지고
뿌리는 튀어나오고 견디지 못한 풀들은
툭 툭 바다로 떨어지고
매일 무언가 사라지는 소리는
파도에 파묻혀 들리지 않을 거야
정말 먼 곳을 상상하면 불안해졌다
우리가 상상을 잘하고 있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우리의 상상이
맞았는지 틀렸는지 알 수 없었고
거짓에 가까워지는 것만 같았다
정말 먼 곳을 상상하는 사이 정말 가까운 곳은
매일 넘어지고 있었다 정말 가까운 곳은
상상을 벗어났다 우리는
돌부리에 걸리고 흙을 잃었으며 뿌리를 의심했다
견디는 일은 떨어지는 일이었다
떨어지는 소리는 너무 작아 들리지 않았다
그래도 우리는 정말 먼 곳을 상상하며 정말 가까운 곳에 서 있었다
그래야 절벽에서 떨어지지 않을 수 있었다
<계약직>
마운트 프로스펙트에는 잘 도착하셨나요
미시간 호수를 유영하는 뒷모습 잘 보았습니다
여전히 곱슬곱슬하고 건강한 머리칼
이따금 낯선 과거가 부풀어 오를 때면
막 업무를 시작한 선생님을 떠올립니다
살얼음 맺힌 머리칼을요
우리는 매일 점심을 함께 먹고
뒤바뀌는 배경을 함께 걸었지요
호기롭게 후식에 열중하기도 하고요
2인용 차량에 셋이 올라타 깔깔대는 게 좋았어요
아무도 울지 않았지만 몸은 잠기고
셋이서 함께하는 몸부림은 수중발레 같기도 했어요
즐거웠지요 파티션 너머로 서로의 배경이 되며
계약은 약을 삼키게 했지만
병환에 대해 아무도 묻지 않는 게 좋았어요
아침엔 살고 저녁엔 사라지는 일들에 대해
아무것도 묻지 않는 게 약이었어요
선생님 마운트 프로스펙트는 어떤가요
그곳에는 선생님을 붙잡는 것들이 있나요
제 약이 떨어져 갑니다
그래도 우리 가끔 동료였지요?
야유회 가는 길에 보았던 안개
눈을 떠도 감아도 하얗던 그 길
그 길에서 함께 찍은 사진을 아무리 들여다봐도
누가 누구인지 아니 누가 있긴 있는 건지
아무리 들여다봐도 알 수가 없어요
그곳에선 길 너머를 볼 수 있나요
서로에게 별명을 주렁주렁 걸어 주며
웃음소리를 선물하던 그런 시간이 그곳에도 있나요
선생님, 그러니까 선생님
<잠의 방향>
아파트 외벽을 따라 자란 나무는
한쪽으로 가지가 자랐다
풍성한 쪽으로 새는 집을 지었다
나는 새집에 사는 새를 본 적이 없다
그곳은 너무 높이 있고 둥지가 깊은 탓이다
새도 우리 집을 본 적이 없다
새는 외벽을 보거나 풍성한 나뭇가지에 앉았다
적어도 내가 보기엔 그랬다
왼쪽 입술을 좀 더 올려 웃고 왼쪽 팔자주름이 더 깊은
우리는 한쪽으로 누워 잤다
등을 바라보며 자는 일은 좋았다
등에서 흘러나온 고단함이 모두를 잠으로 이끌었고
잠은 벽을 따라 자라났다
나는 꿈의 한가운데에서 서로의 얼굴을 보는 일이 좋았다
마주 보고 웃으면 서로의 입술이 반대로 올라갔다
활짝 웃는 것 같았다
꿈은 늘 풍성했지만
우는지 웃는지 알 수 없는 새소리에 눈을 뜨면
우리는 벽 끝에 서 있었다
등을 바라보며 떨어지지 않기 위해 서 있었다
벽에는 나뭇가지 그림자가 풍성했다
우리의 그림자는 외벽을 보거나 풍성한 나뭇가지에 앉아 있었다
적어도 새가 보기엔 그랬다
<텐트 앞에서>
오늘은 공동묘지를 서성입니다 여기선 어떤 마음을 먹어야 하는지 알 수 없어요 대신 주머니에 있던 작은 돌을 올려 두었습니다 희고 붉은 꽃들 명복은 무엇일까 여전히 알 수 없는 일투성이지요
더 이상 손에 쥘 것이 없어 눈을 마주쳐 봅니다 그래도 쥘 수 없는 위로들 우리는 들꽃과 밤먼지를 꼭 쥐고 밖으로 나왔습니다 서로의 입에 반딧불과 새 하늘의 믿음 같은 것들을 넣어 줍니다 믿음은 아무리 씹어도 맛이 나지 않아요 하늘에선 검은 우박들이 또 떨어지고 아아 또 어디선가
희고 붉은 꽃들이 피어날 거야 빛을 반납하고 피어나는 것들이
얼룩처럼 늘어진 철근, 친구의 얼굴을 점령한 검정, 나란히 앉아 내일을 그리워합니다 친구는 매일 밤 물었어요 오늘 어둡지 않았어? 어제를 밝힐 방법에 대해 골몰하고 있어 내일도 어제도 우리를 저 붉은 불꽃들로부터 해방시키지는 못할 텐데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고 고개만 끄덕끄덕 했어요
검은 우박이 쏟아집니다 번쩍하는 폭발음은 이제 익숙한데 노래가 산산조각 나는 건 아직도 낯설어요 이렇게 친구의 꿈이 날아와 옷자락을 적실 때는 도무지 두 손을 움직일 수가 없지요 무너지는 햇빛 아래 작은 돌이 축축합니다 눈물의 움직임이 끄덕끄덕해요 그제야 생각합니다 텐트 안에 두고 온 우리의 명복을
명복은 무엇일까 여전히 알 수 없는 일투성이지요
<예고편>
낯선 소리의 방문
누가 넘어진 걸까 하품인 걸까
준비 없이 맞이한 소리는 방을 떠나지 않았다
준비하던 것들은 준비 없이 사라졌다
낯선 소리는 방 안에 숨어 있다가
소나기처럼 나타나곤 했다
곰팡이가 핀 걸까 홍수일까
사라진 방을 바라보며 누군가 말했다
비명 같기도 했다
우리는 광야나 계시 같은 것을 떠올리며
둥그렇게 모여 앉았다
낯선 소리가 잠든 방 안에 혁명의 시대가 찾아와
이 낯선 소리로부터 해방되기를 주문했다 아니 주문을 외웠다
낯선 소리를 따라 한 명씩 사라졌다 귀신처럼
남은 이들은 낯선 소리에
익숙해져 갔다
넘어져도 하품을 해도 깊은 잠에 들었다
방은 한 칸씩 늘어나고
익숙한 비명이 지면을 장식했다
낯선 소리는 방 안에 숨어 준비된 누군가를 기다렸다
<공유지>
숲을 걸었다
어떤 잎은 시들었고, 어떤 나뭇가지는 건강하다
나는 그늘로 옮겨 가는 바람을 보고
너는 새 그림자를 본다
그것들은 숲을 일구거나 숲의 한 귀퉁이를 잘라 낸다
젖은 흙을 디디거나
마른 뿌리를 부러뜨리기도 했다
햇빛은 언제나 뒷목을 집어삼킬 듯 달려오지
무언가 타는 냄새가 나면 너의 귓불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고
귓불을 타고 넘는 건 유리창 깨지는 소리
그렇게 계속
숲에 가 본 적 있다는 듯 걸었다
가끔 붙잡은 손으로 있으려 할 때면
검은 호수에 이르렀다
물안개 속에서 너의 귓불을 올려다보면 유리창이 덜컹거렸고
붙잡은 손은 뭉그러져 흔들흔들 바람을 탔지
무언가의 먹이가 되거나 곰팡이로 자라나거나
아니면 검은 호수에 잠겨 서로의 입이 뻐끔거리는 것만을 상상하거나
그건 그것 나름대로 좋았겠지만
그럴 때는 걷는 것을 멈췄다
머리를 부여잡고 웅크려 앉아 잠시 쉬었다
구멍 사이로 운동화 끈을 빼내며
아이의 아이가 부르던 노래를 불렀다
옷을 하나씩 벗으면
더 이상 내 목소리가 들리지 않고
네 목소리는 네가 듣는 게 아니야
그렇게 다시 몸을 일으켜 네 옆을 걸었다
숲을 걸었다
<당선소감>
10년 후 내 모습 같은 걸 그려 보는 일은 어려웠다. 계획은 늘 틀어졌고, 예상치 못한 일은 자꾸 찾아왔다. 오늘을 무사히 견디자는 목표만이 살아남았다. 물론 자주 실패했다. 발밑이 무너지거나, 흩어진 나를 찾아 이리저리 뛰어다니거나, 가만히 울면서 오늘을 보낼 때도 있었다. 그런 날엔 시의 힘을 빌렸다. 시를 읽거나 쓰면 내가 덜 초라하게 느껴졌고 덜 외로웠다. 시를 써야 내가 나 같았고 가끔은 근사해 보이기까지 했다.
잘 쓰고 싶었고, 좋은 시를 쓰고 싶었으나 이 또한 자주 실패했다. 그냥 쓰는 수밖에. 시에게 잘 보이려는 마음을 버리고 그냥 쓰는 수밖에. 그러던 오늘 전화 한 통을 받았다. 10년 후 만난 내 모습이 꽤 마음에 든다. 오늘도 내일도 시의 힘을 빌려야지. 이 힘을 여러 사람들에게 나눠 줄 수 있어 기쁘다.
우리 엄마 허경숙, 엄마의 사랑으로 제가 살아 있습니다. 행복의 밀도를 높여 주는 우리 가족, 특히 조카 박지성 고맙고, 사랑합니다. 우리는 더 많이 행복해져야 합니다. 끝까지 저를 지켜봐 주신 박주택 교수님, 격려를 아끼지 않으신 김종희 교수님을 비롯한 경희대 국문과 교수님들, 프락시스연구회와 경희문예창작단, 현대문학연구회 선후배님들이 계셔서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감사합니다. 경환, 승원, 은영, 규진 더 많은 법과 술을 함께합시다. 우리 민서, 현우 건강하자. 나의 가장 큰 위로인 의롱, 말로 다할 수 없을 만큼 고마워. 끝으로 이문재 선생님, 나희덕 선생님 감사합니다. 부족한 제게 내일로 나아갈 수 있는 힘을 주셨습니다. 많이 웃고 울며 계속 쓰겠습니다.
<심사평>
박은지의 정말 먼 곳을 당선작으로 뽑게 된 데에는 과잉된 수사가 주는 피로감 속에서 그의 간결하고 명징한 언어가 상대적으로 돋보였기 때문이다. 다른 투고자들보다 작품의 편차가 크지 않고 전체적으로 안정된 호흡을 지니고 있다는 점도 신뢰감을 갖게 했다.
박은지의 시에는 특히 장소성에 대한 예민한 의식과 상상력이 두드러진다. 시적 화자는 여기와 저기, 현실과 상상, 나타남과 사라짐 사이에서 진자운동을 계속한다. 서로 대립되는 사물이나 세계를 오가며 균형 잡힌 사유와 감각을 보여 주는 그의 시는 현실을 손쉽게 이월하지도, 거기에만 사로잡히지도 않는다.
절벽과도 같은 현실을 견디면서 다른 세계를 상상하는 힘을 잃지 않는 것, 그 리드미컬한 힘으로 그는 정말 먼 곳까지 갈 것이다.
앞으로 펼쳐질 시적 여정을 기대하며 당선을 진심으로 축하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