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진목 - 파로키

사무엘럽 2021. 1. 5. 09:15

 

[민음사] 작가의 탄생 유진목 시집 [민음의 시 275 양장 ] 연애의 책, 삼인 식물원, 아침달 시인 목소리, 북노마드 산책과 연애, 시간의흐름

 

 

 마당을 쓸던 남자가 말했다.

 

 남자는 회빛 덥수룩한 머리에

 낡은 아웃도어 재킷을 입고 있었다.

 

 마른땅에 낚시용 장화를 신고 있어

 제정신이 아닌지도 몰랐다.

 

 내 집엔 아무것도 없소

 

 그런 지 백년은 됐을 텐데

 이렇게 멀쩡히 살아 있다니

 

 신은 참 가혹한 것이오

 

 내게 좋은 것을 준 적이 단 한 번도

 단 한 번도 없다는 것을 신은 알아야 하오

 

 그런데도 멀쩡히 살아 있다니

 

 그러고는 혼자서 한참을 웃었다.

 

 마당에 이는 먼지가 남자를 한차례 지우고 사라졌다.

 

 파로키는 이 집이 좋겠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나는 사람이 없는 집을 원했는데

 파로키는 꼼짝도 하지 않고

 

 내 힘으로 목줄을 당겨 봤자 소용없었다.

 

 돌이켜 생각하면 그런 지 오래되었다.

 

 파로키

 

 그럼 내가 저 사람을 죽여야 해

 

 파로키는 엎드린 채 듣는 둥 마는 둥 했다.

 

 내가 총을 사용한 건 40년 전이었는데

 남자는 내 것을 단번에 알아보았다.

 

 그건 아주 좋은 총이라오

 요즘 사람들은 더 이상 쓰지 않지만

 

 남자는 빗자루를 세워 턱을 받치고 한참을 서 있었다.

 

 나를 이 집에 머물게 해 준다면

 떠날 준비가 되어 있소

 

 혼자서는 어쩔 수 없었지

 깨어나면 사는 수밖에

 

 저기 뒷마당에 죽은 나무가 보이오?

 

 거기서 나도 죽은 사람이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여태 살아 있었으니까

 

 보다시피 내 집엔 아무것도 없소

 여기서 살다간 나처럼 되고 말 거요

 

 그러고는 다시 한참을 웃었다.

 듣고 보니 기침인지 웃음인지 분간이 가질 않았다.

 

 나는 죽은 나무를 향해 걸어가는 파로키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나무는 멀리서 보아도 크고 아름다웠다.

 

 나무도 죽는데

 나는 죽지도 못하고

 

 빌어먹을

 

 남자는 다시 마당을 쓸었고 고운 먼지가 일었다.

 

 해 질 녘 빛이 흙을 따라 반짝이며 내려앉았다.

 

 저 녀석이 나를 먹지 못하게 잘 묻어만 주시오

 내가 바라는 건 그것뿐이오

 

 파로키를 본 사람은 그가 처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