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진목 - 파로키

사무엘럽 2021. 1. 5. 08:49

 

[민음사] 작가의 탄생 유진목 시집 [민음의 시 275 양장 ] 연애의 책, 삼인 식물원, 아침달 시인 목소리, 북노마드 산책과 연애, 시간의흐름

 

 

 내게는 파로키가 있어

 혼자여도 어떻게든 살아갈 수 있었다.

 

 파로키가 있는 동안에 사람들은

 내게 얼씬도 하지 않았다.

 

 나는 파로키와 살면서

 

 평화가 무엇인지

 공포가 무엇인지

 

 그럴 때 어떻게 상대를 응시하는지

 어떻게 상대의 입을 다물게 하는지

 

 어미를 보고 따르는 새끼처럼

 하나씩 배워 나갔다.

 

 파로키가 늙고 병이 들어

 내 손으로 파로키를 땅에 묻을 때

 

 사람들은 그것을 알고

 나를 죽이러 올 것이다.

 

 나는 파로키와 함께 살고

 나는 파로키와 함께 죽고

 

 푸른 눈 파로키가 내 앞에 나타났을 때

 나의 살고 죽는 것을 보았다.

 

 그로부터 나는 파로키와 함께

 숲으로 들어가

 파로키가 먹을 것을 구하러 다녔다.

 

 하루 한 번

 그렇게 좋기만 한 시간이

 

 둘이서 사랑하는 저녁이 올 때 

 

 소리 없이 숲을 걷고

 때때로 가여운 짐승을 발견하고

 

 파로키가 고개를 젓거나

 파로키가 고개를 끄덕이면

 

 나는 파로키의 목줄을 놓고

 파로키가 걸어가는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것은 사람이 없는 삶

 

 사람은 사람끼리 모여

 파로키를 죽여야 한다고

 입을 모아 선동하는 삶

 

 나는 파로키와 사는 것이

 사람과 함께일 때보다 좋았다.

 

 파로키가 없으면

 

 저 여자는 아무것도 아니다

 

 파로키가 아니면

 

 저 여자는 혼자서 살 수 없다

 

 작정하고 몰려와 나를 둘러쌀 때

 푸른 눈 파로키는 그들이 살고 죽는 것을 보았다.

 

 사람들은 가질 수 없는 것을 없애려 하고

 나는 파로키의 목줄을 놓고

 

 파로키가 사람들을 향해 걸어가는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러니 여기에 파로키를 본 사람이 있는지

 이제는 묻지 않을 수 없다.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이 아는 파로키에 대해 말한다. 

 

 첫째, 파로키는 우리와 다르고

 

 둘째, 파로키는 위험하다

 

 셋째, 파로키는 불안의 근원이며

 

 넷째, 파로키는 분열의 씨앗이다

 

 그사이 파로키는 소리 없이 사람들 사이를 걸어다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