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승환 - 검은 돌 흰 돌
1
나는 두 개의 무덤
사이에서 태어난다
나는
극지의 바닥으로 내려간 자정을 알고 있다
적도의 바다 한 점에 머무는 자정을 알고 있다
나는
얼음을 두 손으로 부숴 삼킨다
빙하의 밤 심해의 쇄빙선 안에 갇혀 있다
검은 돌
검은 돌
그림자
자정에서 자정으로
백야에서 백야로
그러나 나는 도끼로
망치로
쐐기로
작살로
나는 투명한 얼음의 밤을 깨뜨릴 수 있는가
2
아이가 묻는다 열쇠는 무엇인가요 침몰한 배의 철문 앞에서
열쇠는 열다와 쇠
열다 닫다 열다 닫다 닫다 닫히거나 잠긴 것 트는 것 벗기는 것 막힌 것 치우고 통하는 것 서랍의 밀폐된 공기를 풀어놓는 것 백지의 책을 펼치는 것 뒤틀리고 불투명하고 선으로 이어지고 끊어진 자리로 이어진 글자 씻어내는 것 이름도 없이 반짝이며 너울지는 은빛 물결 들어올리는 것 바다의 장막과 마주서는 것
쇠
쇠
철의 바람 소리를 눈으로 듣는 것 마주치는 것
칼을 받아들이는 것
솟구치는 피의 음악 속으로 잠겨드는 것
가라앉은 배의 키를 놓치지 않는 것
파선의 바닥에서
쇠
쇠
내가 쓰는 것
묻는다
묻는다
3
마뇰
마뇰리아
매그놀리아
머그올려
먹올려
목올여
목려
목련
공기의 진동을 일으키는 밤의 태양
검은 12월
대륙의 흙과
흰 1월
바다의 파고를 타고 오는 소리
꽃은
맞닿아 있는가
맞닿아 있는가
숨은
결은
열릴 것인가
목련
숨결의 멈춤과 그 너머가 있다
목련
아이가 말한다
하얗게 타오르는 빛 속에 용솟음치는 검은 재가 있다
4
노를 젓는다
노를 젓는다
바다의 심원에 파묻힌 선실 안에서
움직이지 않는 어둠의 선체 안에서
부러진 나무를 연필 삼아
찢어진 옷깃을 종이 삼아
흔적 없는 밤의 팔 젓기로
필적 없는 밤의 노 젓기로
밤의 페이지에 쓴다
나는 모든 빛이 통과하는 어둠 속에 서 있다
나는 닻을 늘어뜨리고 암초를 긁으며 좌초된 배 안에 있다
나는 하나의 짐이 아니라 하나의 힘이 되는 기억을 갖고 있다
나는 수평선 위로 솟아오르는 자줏빛 태양의 광선을 떠올린다
나는 광대한 검정을 가리키는 아이의 흰 손가락을 바라본다
계속할 것인가 멈출 것인가
나는
납빛
낯빛
그림자는
만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나타나는 것이다
밤의 미광 속에서
밤의 정적 속에서
검은 돌
검은 돌
흰 돌
아이는
묻는다
묻는다
5
검은 깃털은 검은 깃털에서 나온 것인가
검은 돌은 검은 돌로 남는가
초록의 에메랄드는 태양의 광원 속에서 왜 희거나 붉거나 푸르거나 검은가
백조는 백조이고 흰 돌은 흰 돌인가
삼월에 명자가 떨어지면 슬픈 것인가
삼월에 아이가 태어나면 기쁜 것인가
사월은
아직 존재하지 않는 것
이미 존재하는 것
지금 지나가고 있는 것
끊임없이
아무도 아닌 것
아무것도 아닌 것
파도는 흰 모래밭에 검은 거품을 남긴다
파도는 흰 모래밭에 거문 거품을 남긴다
아이는
끝없이
끝까지
계속
거침없이
6
도끼로
망치로
쐐기로
무력하게
무용하게
무참하게
무한히
빙하를
백지를
무덤을
바다를
바닥을
나는
마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