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승환 - 검은 돌 흰 돌

사무엘럽 2021. 1. 1. 13:41

 

당신이 있다면 당신이 있기를:송승환 시집, 문학동네 전체의 바깥:송승환 비평집, 문학들 이노플리아 드라이 아이스 송승환 시집, One color | One Size@1 문학과지성사 클로로포름 -문학과지성 시인선 402 측위의 감각, 서정시학

 

 

 1

 

 나는 두 개의 무덤

 사이에서 태어난다

 

 나는

 

 극지의 바닥으로 내려간 자정을 알고 있다

 적도의 바다 한 점에 머무는 자정을 알고 있다

 

 나는

 

 얼음을 두 손으로 부숴 삼킨다

 빙하의 밤 심해의 쇄빙선 안에 갇혀 있다

 

 검은 돌

 검은 돌 

 

 그림자

 

 자정에서 자정으로

 백야에서 백야로

 

 그러나 나는 도끼로

 

 망치로

 

 쐐기로

 

 작살로

 

 나는 투명한 얼음의 밤을 깨뜨릴 수 있는가

 

 

 2

 

 아이가 묻는다 열쇠는 무엇인가요 침몰한 배의 철문 앞에서

 

 열쇠는 열다와 쇠

 

 열다 닫다 열다 닫다 닫다 닫히거나 잠긴 것 트는 것 벗기는 것 막힌 것 치우고 통하는 것 서랍의 밀폐된 공기를 풀어놓는 것 백지의 책을 펼치는 것 뒤틀리고 불투명하고 선으로 이어지고 끊어진 자리로 이어진 글자 씻어내는 것 이름도 없이 반짝이며 너울지는 은빛 물결 들어올리는 것 바다의 장막과 마주서는 것

 

 쇠

 

 쇠

 

 철의 바람 소리를 눈으로 듣는 것 마주치는 것 

 

 칼을 받아들이는 것

 

 솟구치는 피의 음악 속으로 잠겨드는 것

 

 가라앉은 배의 키를 놓치지 않는 것

 

 파선의 바닥에서

 

 쇠 

 

 쇠

 

 내가 쓰는 것

 

 묻는다

 

 묻는다

 

 

 3

 

 마뇰

 마뇰리아

 매그놀리아

 머그올려

 먹올려

 목올여

 목려

 목련

 

 공기의 진동을 일으키는 밤의 태양

 

 검은 12월

 대륙의 흙과 

 

 흰 1월

 바다의 파고를 타고 오는 소리

 

 꽃은

 

 맞닿아 있는가

 맞닿아 있는가

 

 숨은

 결은

 

 열릴 것인가

 

 목련

 

 숨결의 멈춤과 그 너머가 있다

 

 목련

 

 아이가 말한다

 

 하얗게 타오르는 빛 속에 용솟음치는 검은 재가 있다

 

 

 4

 

 노를 젓는다

 노를 젓는다

 

 바다의 심원에 파묻힌 선실 안에서

 움직이지 않는 어둠의 선체 안에서

 

 부러진 나무를 연필 삼아

 찢어진 옷깃을 종이 삼아 

 

 흔적 없는 밤의 팔 젓기로

 필적 없는 밤의 노 젓기로

 

 밤의 페이지에 쓴다

 

 나는 모든 빛이 통과하는 어둠 속에 서 있다

 나는 닻을 늘어뜨리고 암초를 긁으며 좌초된 배 안에 있다

 나는 하나의 짐이 아니라 하나의 힘이 되는 기억을 갖고 있다

 나는 수평선 위로 솟아오르는 자줏빛 태양의 광선을 떠올린다

 나는 광대한 검정을 가리키는 아이의 흰 손가락을 바라본다

 

 계속할 것인가 멈출 것인가

 

 나는

 

 납빛

 

 낯빛

 

 그림자는

 만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나타나는 것이다

 

 밤의 미광 속에서

 밤의 정적 속에서

 

 검은 돌

 검은 돌

 

 흰 돌

 

 아이는

 

 묻는다

 

 묻는다

 

 

 5

 

 검은 깃털은 검은 깃털에서 나온 것인가

 검은 돌은 검은 돌로 남는가

 

 초록의 에메랄드는 태양의 광원 속에서 왜 희거나 붉거나 푸르거나 검은가

 백조는 백조이고 흰 돌은 흰 돌인가

 

 삼월에 명자가 떨어지면 슬픈 것인가

 삼월에 아이가 태어나면 기쁜 것인가

 

 사월은 

 

 아직 존재하지 않는 것

 이미 존재하는 것

 지금 지나가고 있는 것

 

 끊임없이

 

 아무도 아닌 것

 아무것도 아닌 것

 

 파도는 흰 모래밭에 검은 거품을 남긴다

 파도는 흰 모래밭에 거문 거품을 남긴다

 

 아이는

 

 끝없이

 

 끝까지 

 

 계속

 

 거침없이

 

 

 6

 

 도끼로

 

 망치로

 

 쐐기로

 

 무력하게

 

 무용하게

 

 무참하게

 

 무한히

 

 빙하를

 

 백지를

 

 무덤을

 

 바다를

 

 바닥을

 

 나는

 

 마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