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하 - 귤의 이름은 귤, 바다의 이름은 물

사무엘럽 2020. 12. 25. 08:47

 

제주에서 혼자 살고 술은 약해요:이원하 시집, 문학동네 [달] 내가 아니라 그가 나의 꽃 (이원하) (마스크제공), 단품 신춘문예 당선시집(2018), 문학세계사

 

 

 바다를 보면 어쩐지 번거로워져요

 멋지고 놀라워도 어쩐지

 번거로워져요

 

 봄을 꽃이나 감동이라 부르지 않고

 그냥 봄이라 부르는 것처럼

 바다도 서쪽과 동쪽으로 구분하지 않고

 파랗다거나 칠흑이라 표현하지 않고

 

 그냥

 물이라고 부르면 될 텐데

 번거롭게도 바다 앞에선 생각이 많아져요

 

 바다는 트럭도 삼키고 고양이도 삼키지만

 중력 앞에서는 한없이 약해져요 그렇기 때문에

 매일 밤마다 중력을 이기는 달을 보면서

 어쩔 줄 몰라하는 것이에요

 

 그때마다 나는 달빛 아래서 성별도 없는 달이

 까맣게 그을리기를 바라고 원하게 돼요

 

 바닷물이 닿았던 골목길을 한 줄 한 줄 모아서

 땋다보면 땋는 과정에서 열 번의 한숨 끝에

 준비 없이 비를 맞게 돼요

 

 홀딱 젖었고 골목길에 끊긴 곳이 없었으므로

 바다와 관련된 나의 모든 것은 아직 늦지 않았다고

 생각하게 돼요

 

 거울을 보면 수국의 슬픔이 서 있어요

 

 귤이 내게 준 것이 귤인 것처럼

 봄이 내게 준 것이 봄인 것처럼

 소나기가 내게 준 것이 물인 것처럼

 바다가 앞으로 내게 줄 것도

 그거라면 좋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