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이원하 - 귤의 이름은 귤, 바다의 이름은 물
사무엘럽
2020. 12. 25. 08:47
바다를 보면 어쩐지 번거로워져요
멋지고 놀라워도 어쩐지
번거로워져요
봄을 꽃이나 감동이라 부르지 않고
그냥 봄이라 부르는 것처럼
바다도 서쪽과 동쪽으로 구분하지 않고
파랗다거나 칠흑이라 표현하지 않고
그냥
물이라고 부르면 될 텐데
번거롭게도 바다 앞에선 생각이 많아져요
바다는 트럭도 삼키고 고양이도 삼키지만
중력 앞에서는 한없이 약해져요 그렇기 때문에
매일 밤마다 중력을 이기는 달을 보면서
어쩔 줄 몰라하는 것이에요
그때마다 나는 달빛 아래서 성별도 없는 달이
까맣게 그을리기를 바라고 원하게 돼요
바닷물이 닿았던 골목길을 한 줄 한 줄 모아서
땋다보면 땋는 과정에서 열 번의 한숨 끝에
준비 없이 비를 맞게 돼요
홀딱 젖었고 골목길에 끊긴 곳이 없었으므로
바다와 관련된 나의 모든 것은 아직 늦지 않았다고
생각하게 돼요
거울을 보면 수국의 슬픔이 서 있어요
귤이 내게 준 것이 귤인 것처럼
봄이 내게 준 것이 봄인 것처럼
소나기가 내게 준 것이 물인 것처럼
바다가 앞으로 내게 줄 것도
그거라면 좋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