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하 - 내가 나를 기다리다 내가 오면 다시 나를 보낼 것 같아

사무엘럽 2020. 12. 25. 08:21

 

제주에서 혼자 살고 술은 약해요:이원하 시집, 문학동네 [달] 내가 아니라 그가 나의 꽃 (이원하) (마스크제공), 단품 신춘문예 당선시집(2018), 문학세계사

 

 

 이 동네에 그만 앉아 있을래요

 

 섬에서 높이 날아올라 육지로 가겠다는 말이기도 해요

 누구든 당장 만날 수 없는 곳이 섬이니까요

 우연이 없는 곳이니까요

 

 수화기에 대고 엄살을 한 솥 쏟았어요

 군인에게

 

 가끔씩 섬에 갇혀 있다는 기분이 들면

 한없이 땅을 파게 되는데

 어제가 그랬거든요

 

 군인을 섬에 데려올 순 없지만

 군인은 숲과 같을 테니

 내가 이 섬 안에 숨겨줄 수 있어요

 밤에 흰옷을 입고 다녀도

 보호해줄 색이 많은 곳이니까요

 

 근데 그게 잘 안 돼요

 꿈만 꾸게 돼요

 

 추워요

 빨간 내 얼굴이 중요해요

 

 빨개진 김에

 동백꽃 사이에 서면 내 얼굴이 숨겨질 것 같아요

 

 내가 쓸쓸해도 이 섬에 버티는 이유는

 동백꽃 필 때 마침 얼굴이 빨갛기도 할뿐더러

 섬에서 살 수 없다면 배 위에서라도 살고 싶었던 때가

 있었기 때문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