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명 - 발화

사무엘럽 2020. 11. 10. 02:31

 

쇼펜하우어 필경사, 천년의시작

 

 

 관솔 연필통이 내게로 왔다

 언제나 흔적은 내가 뱉어 낸

 어제로부터 온다고

 수금하러 왔다

 만지면 손금을 타고 혈류를 타고 감돌아

 관계사를 모르겠어?

 긴 낭하 끝에 자란 풀들은 기억의 모집단

 싱싱한 풀잎만 골라내는 내 표본실에서는

 옹이가 말을 건네듯

 연결어미가 중요하지

 달의 인력 같은 기억술이야

 세월에 빚진 자들의 장서는 항시 마지막 장에 펼쳐져 있다

 손대면 관솔 불빛이 내 지층 연안을 뒤적일 거 같아

 독설로 쌓인 모래톱의 주름은 꽃으로 바꿀 수 없어

 너는 미안이라는 말을 듣지 못하고

 화난 비늘도 보이지 않은 채

 미안으로 등을 만들고 둑을 만들어

 사행천으로 흘러가 버렸어

 달빛에 뒤척이는 은파로 말을 건넸지만

 점점 멀어져 갔지

 연흔이야

 수많은 너는,

 

 까먹은 네 발자국마다 화승총 냄새가 난다

 가을이라는 풀무덤 속에 두 귀가 길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