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연호 - 오월

사무엘럽 2020. 12. 21. 01:03

 

저녁의 기원:조연호 시집, 최측의농간 유고:조연호 시집, 문학동네 암흑향, 민음사 천문, 창비 농경시, 문예중앙

 

 

 비 내리던 오월이 그쳤다. 숲이 가난한 자들의 빈 그릇 속으로 들어왔다. 나는 모서리에 몰려 서서 심장이 저울질 당하는 소리를 들었다. 부드러운 비에 꽂혀 하늘이 아프게 하수구까지 걸어온다. 쥐들의 지붕 타는 소리가 엄마의 재봉틀 굴리는 소리만큼 크다. (뜻도 없이 문이 밀쳐지고, 한 번쯤 분노해야 할 일이 없을까. 나는 그리다 만 그림에 붉은 명암을 넣었다.) 어쩌면 세상은 평안하고, 이렇게 될 줄 예감하면서 주일이면 동네 확성기에서 찬송이 쏟아졌을 것이다. 죽은 꽃과 죽은 바람을 차마 볼 수 없어 燈을 켜지 않았다.

 

 오월은 늦은 식사로부터 와서 늦은 식사로 떠난다. 붉고 지친 꽃잎 위로 지하 방직공장 실먼지가 희미하게 올라온다. 늦은 식사, 우는 엄마들, 햇복숭아를 사 들고 칠팔월로 훌쩍 가 버리는 오월, 분수대에 손을 넣고 바람의 패총을 줍는다. 덜 마른 기억의 껍질들이 손가락 사이로 뚝뚝 떨어진다. 앙천의 눈매 되뜨는, 이 짙은 오월, 한 번쯤 분노해야 할 일은 없는가. 비 갠 하늘빛을 따라 느린 삶을 옮기는 달팽이와 그의 늙은 집과 그의 집이 옮겨 가며 뒤에 남는 반짝이는 것들이 함께 모두 길이 되어 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