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문자 - 야생

사무엘럽 2020. 12. 9. 13:05

 

우리가 훔친 것들이 만발한다:최문자 시집, 민음사 파의 목소리:최문자 시집, 문학동네 사과 사이사이 새:최문자 시집, 민음사 최문자 시세계의 지평, 푸른사상

 

 

 시인에게 치매가 온다면

 맨 먼저 산책하다 길을 잃겠지

 숲속을 걷고 걷다가 공터가 나오면 우두커니 서서 새 떼를 만나고 새의 언어로 구름의 언어로 말하는 사이 노을이 지고 어두컴컴한 풀 속에 가만 서 있으면 누가 손목을 끌어다 집에 데려다 줄 것이다

 

 딸이 탕 안에 물을 채우는 사이 아마도 나라면 비누를 풀어낼꺼야

 

 스무 살 기억의 비누는 잘 풀리겠지

 

 한 박스 다이알 비누가 마구마구 거품을 날리고

 기억을 볼 수 있는 거울에 김이 서리면

 옆에 서 있던 사람

 사람 곁에도 없고 탕에도 없고

 거품과 비누와 사람들을 몽땅 잃었다고 울고불고 무서워할 거야

 

 비누로 지운 것 중에

 불러도 오지 않는 말 몇 마디 야생의 가지들

 파랗고, 동그란 접시 같고

 달 모양으로 된 거울을 만들면서 사물들이 거울 속에서 나를 찾는다고 나는 탕을 나갈 것이다

 딸은 울면서 도랑에 빠져 맨발로 떨고 있는 나를 다시 찾아내겠지

 탕에 물을 채우고 라벤다 거품을 또 한 번 내 줄 때

 나는 탕 속에 더 깊이 남아서 말할수록 말을 잃어버리고 끝내는 라벤다 꽃을 버리고 물을 넘어서 탕을 나올 것이다

 없어지는 것들과 함께 공기들을 휘저으며 말로 못하고 자꾸 뒤돌아보다 자욱한 안개 들판으로 사라질 것이다 두고 온 도시는 모두 희미한 얼룩 기다리지 않는 쪽으로 나는 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