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문자 - 크레바스

사무엘럽 2020. 12. 9. 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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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너를 돌아본 적 있다

 해바라기 씨를 심고 해바라기를 돌 듯

 너를 심고 너를 돌 때

 텅 빈 적막을 알았다

 물 주는 시간을 알았다

 해바라기처럼 눈 감는 시간을 알았다

 세상 모든 정오에

 샛노란 꽃잎도 까맣게 타 죽으려는 것을 알았다

 새들은 

 너무 펄럭이면서

 나를 돌다 세상까지 돌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죽음보다 더 많이 죽으려고

 눈물방울이 허공을 뛰어내리는 것을 알았다

 해바라기가 자라서

 나를 돌고도 남을 때

 말도 안 되는 모국어로

 커다랗고 둥근 꽃 한 송이가 나를 사랑한다고 말한 적 있다

 해바라기 베어 낸 자리 

 해바라기가 빠져 죽은 크레바스

 나는 여름에도 빙벽 위를 달리는 여자

 건너뛰다 보았다

 보름달처럼 떠오르는 둥근 해바라기 꽃잎

 한여름에도 크레바스를 만들고 있는 너를 알았다

 너도 나처럼 나를 돌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