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문자 - 비누들의 페이지

사무엘럽 2020. 12. 8.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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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눈물이 나는 건

 슬픈 시를 쓰는 건

 모두 비누 때문이지

 소량의 물에도 사라지는 거품이 그리는 그림

 불행한 불확실성 때문이지

 

 죽어도 거품이 일어나지 않던 그해

 논문 두 편 쓰고

 두 번째 아이를 지우고

 가능하지도 결코 불가능하지도 않았던

 빡빡한 영혼으로 누구를 사랑한 적 있다

 끊어진 계단

 무릎을 다치며

 귀뚜라미 두 마리처럼

 유리문에 숨을 붙고 작은 소리를 내다 죽는 일이었다

 나를 모르는 자와

 그를 모르는 내가

 비누의 페이지로 가서

 거품으로 말을 나누고

 장롱 깊은 곳에 그 말들을 넣어 두었지만

 말조차 깊은 비누였던 것

 

 깊은 서랍을 열고

 쓸데없이 남은 것들을 뒤적이다 그때의 분홍 비누 한 조각을 찾아냈다

 지금은 어떤 거품을 만들지 고민하지 않는다

 

 얼마나 달렸을까

 어떤 후회스러운 청춘이 지나간 미끄러운 길로

 한 불확실한 거품을 통해

 그해 겨울

 끝없이 폭설이 내리고

 거짓말처럼 나의 모든 비누들은 눈 속에 잠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