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순 - 꽃잎이 피고 질 때면

사무엘럽 2020. 12. 5. 01:23

 

당신의 첫, 문학과지성사 날개 환상통:김혜순 시집, 문학과지성사 피어라 돼지:김혜순 시집, 문학과지성사 슬픔치약 거울크림:김혜순 시집, 문학과지성사 어느 별의 지옥

 

 

 꽃잎 돋으면 어쩌나. 가려워 어쩌나. 봄이 왔다고 산전초목 초록 입술 쫑긋 내미는데 이제 어쩌나. 당신들의 들러붙은 무릎 사이, 당신들의 맞붙은 입술 사이, 세상의 모든 구멍이란 구멍 비집고 이파리 돋아나는데 어쩌나. 나 엎드려 기어가서 이 초록 벌판 다 짓이겨버리려네. 이 환한 초록 바다, 깊은 구멍 다 메꿔버리려네. 초록 속에는 시신들이 내뱉는 추깃물, 쓰디쓴 파랑, 검은 떫음, 붉은 비린내, 입술 화한 노랑, 다 들었으니 나 이 깊은 구만리장천 연초록 구멍들 다 씹어 삼키려네. 이것들 뭉개서 온몸에 칠갑하려네. 내 두 손 두 발 다 묶어놓고 개 밥그릇에 밥 던져주던 사람들 앞에서, 내 입으로 내 구멍으로 이 풀밭 이 산천 이 넓은 초록 바다 다 짓이겨버리려네. 온몸에 깜깜한 눈 번쩍 뜨려네. 꽃이 피면 어쩌나. 온몸에 꽃피는 구멍들 가려워 어쩌나. 자장자장 그 꽃 재워줄 손길도 없는데, 세상의 구멍이란 구멍은 다 몸 열어 새끼를 낳는데, 뜨거운 몸 뒤트는 이 연초록 벌판 어쩌나. 

 

 기도하라하네 쉬지말고기도하라하네 눈물로간청하라하네 순종하라언제나순종하라그러네 이 세상 구멍으로 태어났으니 또다시 구멍을 낳으라 그러네 무슨 잘못을 저질렀단 말인가 용서를 빌지 않고는 이 세상 넘어갈 수 없다하네 무릎꿇으라하네 벌레처럼머리를조아리라하네 두손으로싹싹빌라하네 낮추고낮추라하네 무릎을꿇고오줌발을받으라하네 가슴을치며회개하라하네

 

 열두 마리 새끼 밴 개 한 마리처럼 입에 거품을 물고 네발로 땅 짚고 배를 맨땅에 부비며 새싹들을 뭉개며 어디로 가는지 아는지 모르는지 봄인지 겨울인지 비척비척 가려워 아 가려워

 

 하늘만큼 땅만큼 커다래져서 한눈에 보이지도 않는 여자가 하나 지나가네 뒤뚱뒤뚱 지나가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