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김혜순 - 혼령혼례
사무엘럽
2020. 12. 5. 01:04
날아가버린 연들이 모여 사는 나라가 있었나 보다
그 나라에서 희디흰 실들이 쏟아져 내리는 저녁
비단보다 차갑고 질긴 알몸이었나 보다
희디흰 알몸을 풀어 한정 없이 물레를 돌리는 저녁
하늘에서 내려온 먼 옛날의 레이스 문자들이 우리를 꽁꽁 마취해버려
하는 수 없이 무거운 수화로 몸속의 축가를 꺼내보는 저녁
먼 데를 바라보던 허전한 얼굴들 마주 보는 나라가 있었나 보다
두 얼굴 사이 어두운 허방에 작은 들꽃 같은 조심스런 웃음이 펄 펄 내려앉더니
하객을 실은 버스 한 대가 눈길에 미끄러져 내동댕이쳐지고
걸치면 몸 지워지는 희디흰 면사포 여민 채 서로 멀어져버린 저녁
날아간 연들이 모여 사는 나라에서 보내온 희디흰 청첩장이 있었나 보다
희디흰 종이에 쓴 내 검은 글씨들 지우려고, 검은 종이에서 희디흰 글씨들 내려오는 저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