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철 - 저승사자 놀이를 하던 대낮

사무엘럽 2020. 12. 2. 20:40

 

문학수첩)오늘의 냄새 : 이병철 시집 (시인수첩 시인선 10) [새미]원룸속의 시인들 - 새미비평신서 22, 새미 우리들은 없어지지 않았어:이병철 산문집, 산지니 낚 ; 詩 : 물속에서 건진 말들, 북레시피

 

 

 이것은 돋보기로 개미를 태우던 날의 일기다

 

 괄약근 풀린 태양이 묽은 빛을 한 무더기 싸지르던 대낮

 냄새와 향기를 구별하지 못하는 아이들은

 라일락 한 움큼씩 꺾어 버리다 지루해졌다

 

 커피를 마시는 것이 금지된 아이들의 발치로

 커피 알갱이 같은 개미 떼가 알레그로 모데라토

 아직 태어나지 않은 음악의 악보를 그리며 기어올 때

 

 저승사자 놀이를 하자!

 

 잘 익은 머리통에서 실잠자리 같은 연기가 팔랑였다

 구구단 너머에는 수가 없는 줄 알았기에

 수북이 쌓인 개미들의 주검에서 웃음소리가 났고

 돋보기에 고인 하늘이 찰랑거렸다

 

 우리도 죽어?

 

 묵직한 음악이 빛의 항문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게 보였다

 아이들의 목숨이 구구단을 넘지 못하리란 걸

 알고 있었다, 커피를 마실 수 있게 되었을 때

 나는 그날의 놀이를 잊어버렸지만

 

 아이들은 걸어 들어갔다

 돋보기로 개미를 태우던 날의 일기 속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