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종규 - 내 안의 계단

사무엘럽 2020. 11. 29. 18:32

 

공중을 들어 올리는 하나의 방식:송종규 시집, 민음사 당신이라는 호수 민음사 녹슨방

 

 

 너로 인해 나는 세계를 경청하고

 너로 인해 나는 세계를 오독한다

 너로 인해 획을 긋고 지나가는

 수많은 시간들에게 목례를 보내고 너로 인해 나는, 가여운 삶을

 옹호한다

 

 너는 소름 끼치는 전율이거나 벼랑이지만 너로 인해 나는 한 번도 환멸이라는 역에 내린 적이 없다

 너는, 조금 높은 곳에 있는 종이거나 아주 낮은 곳에서 세계를 계측하는 추인 듯하다

 

 말라붙은 생선 비늘 같은 날들이 불 꺼진 발등을 밟고 지나간다

 한 점 바람도 없는데 끊임없이 제 몸에 무늬를 새기는 못물 위로 결결

 슬픔이 떠밀린다 그러나,

 

 너로 인해 우주는 황혼의 식탁 위에 천 개의 숟가락을 가지런히 얹고

 너로 인해 소요로 가득하던 내 안의 계단들이 폭설 속에 묻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