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종규 - 어린 별들이 가득한 창공에서

사무엘럽 2020. 11. 28. 14:46

 

공중을 들어 올리는 하나의 방식:송종규 시집, 민음사 당신이라는 호수 민음사 녹슨방

 

 

 빛으로 뭉쳐진 하얀 밥을

 어린 벌레들이 파먹고 있는 봄날의 변두리에서

 

 부드러운 바람은 파문 져 내 안으로 스며들기도 했는데

 공중 높이 슬픔을 매달고 수많은 부표들이 떠 있기도 했는데

 

 그날 나는 극장에 있었고

 그날 나는 사막의 한가운데 있었고

 그날 나는 수초들이 무성한 협곡에 있었고, 그날 나는

 당신이 없는 공원의 빈 벤치에 앉아 있었다

 극장의 B열 27번은

 적나라했다 사무침이 적나라했고

 굴곡 많은 격정의 삶이 적나라했고

 낡고 헐렁한 창문의 적요가 적나라했다

 

 누군가 절체절명의 질곡에 서 있고

 누군가 화면으로 구겨져 들어가 싸늘한 밥을 씹는다 하더라도

 세상의 모든 저녁과 나비는 고전이다

 세상의 모든 당신과 세상의 모든 침묵은 고전이다

 

 그날 나는 극장에 있었고

 그날 나는 불운한 예감으로 부글거리는 상수리나무 숲의

 한가운데 서 있었다

 그날 나는 당신이 없는 바닷가를 헌 신문지처럼 서성였다

 한 시대가 흘러가고 있었다

 

 화면이 채 지워지기도 전에

 주인공이 가슴을 움켜쥐고 쓰러지기도 전에

 모래바람이 입안으로 휘몰아쳐 들어왔다

 당신이 없는 첫 저녁이 까치발을 들고

 아름다운 봄날의 끝을 건너가고 있었다

 

 어린 별들이 가득한 창공에서 빛들이, 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