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녀 - 검은 재로 쓴 첫 줄

사무엘럽 2020. 11. 27. 11:47

 

양들의 사회학:김지녀 시집, 문학과지성사 [민음사] 방금 기이한 새소리를 들었다 (마스크제공), 단품 시소의 감정, 민음사

 

 

 나는 입구였다, 줄지어 내게로 달려 들어온 것들이 뒤엉킨 자리에서 봉투처럼 밀봉되어

 내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몰랐다

 

 낯선 손과 악수하며 네번째 온 사람, 여섯번째의 노인이나

 아흔두번째의 양으로

 다시 나를 반죽해놓고

 백지 위에서

 뛰어내리고 있었다,

 

 안개 속으로,

 짐승의 소리를 듣고 술렁이는

 숲 속으로, 너의 그림자 속으로,

 이 모든 것을 집어넣을 수 있는

 불 속으로,

 

 아침을 사전에서 지우고 호주머니가 깊어졌네

 내 앞에 놓인 백지가 넓어지고, 비틀거리면서

 밤이 왔네

 좁고 어두운 창문은 나의 몇번째 밤인지

 모든 계절이 추웠네

 

 나를 향해 돌진하는 눈빛으로

 찢어진 페이지,

 두 발을 잃고 넘어지는 고독한 나의 페이지,

 

 언제까지나 나는 입구였다, 백지 위에서

 숲이 검게 우거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