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녀 - 개미들의 통곡

사무엘럽 2020. 11. 27. 10:56

 

양들의 사회학:김지녀 시집, 문학과지성사 [민음사] 방금 기이한 새소리를 들었다 (마스크제공), 단품 시소의 감정, 민음사

 

 

 수천

 수만의

 저 소리들 모양들

 집이 되기도 하고

 길이 되기도 하는

 

 발자국

 발자국

 발자국

 

 뒤꿈치를 들고 걸어도

 모든 것이 무너지는 세계

 

 이것을 망각이라고 합시다

 

 파도 소리를 들었어요

 집을 짓고 싶은데

 기둥을 세우고

 지붕을 만들고 싶은데

 

 오늘이 흘러내립니다

 구름이 흘러내립니다

 

 걸을 때마다 아물지 않는 이곳엔

 집들이 무성하게 무너져 있어요

 파도 소리가 들려요

 

 낮게 기어가며 부딪는 소리에 따라

 여럿인 발이 빠르게

 달려가네

 

 구겨진 종이처럼

 뼈가 없는

 공명하기 좋은

 

 발자국 

 발자국

 발자국

 

 태어나고 죽고

 다시 태어나 죽을 때까지

 

 이것을 기다림이라고 할까요?

 

 알약들처럼

 한 움큼을 잡아

 입에 털어 넣고

 잠시 잠깐

 나는 고요해집니다

 스르르륵

 내 안에서 녹고 있는 것

 

 방향이 없이

 

 당신이 흘러갑니다

 내가 흘러갑니다

 

 발자국들이 중얼거리며

 길이 되고

 숲이 되어

 빛날 때

 도처에서 바람이 삐죽하게 자란다

 

 무너지고 무너지면서

 일생이 되는

 세계가 움직이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