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녀 - 알약들이 녹는다는 것

사무엘럽 2020. 11. 26. 21:26

 

양들의 사회학:김지녀 시집, 문학과지성사 [민음사] 방금 기이한 새소리를 들었다 (마스크제공), 단품 시소의 감정, 민음사

 

 

 창문들이 내 주위를 빙빙 돌며

 휘파람을 분다

 신사 숙녀 여러분, 밤이 돌아왔습니다

 복도를 지나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는

 이 밤의 병명은 무엇입니까

 잠깐 자고 일어나 길게 하품하는

 입속은 한겨울 비닐하우스처럼 후텁지근해

 쫄쫄쫄 식도를 따라 내려가는 물에선 약냄새가 진동하는데

 낡은 유니폼을 갈아입고 있는 밤이여, 오늘은

 수용소 문학을 이해할 것 같은 날이기에

 소각장의 연기가 무럭무럭 피어나는 것을 위로할 겨를이 없네

 꿈을 꾸고

 겁을 먹고

 토사처럼 몸이 무너져 내려도

 나는 영생을 믿지 않고

 윤회 또한 내 차례까지 돌아오지 못할 것을 알지만

 기도로 시작해서 기도로 끝나는 이웃들의 침대 위에서

 믿음은 쉬지 않고 중얼거린다

 누가 저 사람 입 좀 다물게 할 수 없어?

 가래침처럼, 믿음은 왜 저리 끈적한 건지

 내 쓰레기통에는 믿음이란 낱말들이 수북이 쌓여 있다

 붉은 십자가의 전원을 내리고

 나의 머리맡에 자비를

 그러나 나의 기도는 두 손 사이로 미끄러지는 비누처럼

 거품이 잘 나지 않는다

 양쪽 다리에 깁스를 하고 누운 밤이여, 창문들이여

 잠들었는가, 물끄러미라는 부사가 나를 수식해도

 나는 나를 증명해줄 만한 소속이 없네

 창밖을 바라봐도 자꾸 내가 흐릿하게 나타나는 건

 내 안의 암흑이 깊어지는 탓일까

 새벽이 올 때쯤

 이웃들은 하나둘씩 일어나 기도를 하고

 나는 색색의 크고 작은 알약들을 또 입에 털어 넣는다

 연기가 흘러가는 쪽으로

 비밀이 더 많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