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태운 - 피서 외 9편 (2014 문예중앙 신인상 당선작)
<피서>
마찰하는 것에는 보풀이 일었다 자주 스위치를 껐다 켰고 비누에는 균열이 생겼다 비나 내렸으면 그러나 햇빛이 부서져 내렸다 파이프는 계속 삐 소리를 냈고 하늘에는 버짐이 피어나고 있었다 너는 비틀어진 선로였다 그러니 이탈할 것 여러 번 다짐을 했고 면벽했다 여분의 무게로 나무는 흔들리고 있었다 무언가 자주 간섭했고 그러나 그것이 쉽게 떠오르지 않았다 출구가 전환되고 있었다 청과점 앞에는 아지랑이가 오래 정체했다 네 동공은 우주 같았고 그러나 빈 우주에서 나는 독백하는 배역을 맡았다 또 한 편의 여름이 재생되었다 나는 일상을 적지 않았다
<모색>
당신은 동공으로 우리의 거리를 나타냅니까
동공의 검은빛의 붉은 실을 당겨 눈꺼풀을 덮을 때
눈은 차츰 저물어갑니다
동공이 당신을 구체적으로 모색하는 시간입니다
하루가 목욕하고 있습니다
비가 거리를 앗아갈 때까지
그 사이 당신의 종아리에 커튼의 음영을 그려 넣습니다
감지되는 나와 지향하는 나는 한 몸에서 서로를 시늉하고 있습니다
붉은 실은 헝클어지고
나의 각성은 당신의 반경 내에서 묘연합니다
내 정체를 보여주겠습니다, 당신이
사라졌음을 증명해 보인다면
그 동공이
<벽>
머무르는 사이 나는 방음이 되지 않는다.
소리는 침몰하듯 흘러들어 방을 채우고
벽을 반쯤 열어둔다
나는 쉽게 혼동됩니다
겨울에는 매미를 상상했습니다
건너편으로 소요가 일었다
나는 벽을 확신합니까
벽은 지속됩니다
벽을 갈아엎은 적 있습니까
나를 여러 번 드나들었습니다
벽은 얼마나 높습니까
나는 벽에 붙어 기를 잰 적이 있습니다
벽에도 꽃이 핍니까
흉건한 곳으로 꽃이 젖어들어갑니다
나는 꽃을 헹구고 건져냅니다
벽이 벽을 막아서기도 합니까
소리가 더 큰 소리에 묻혀 잠듭니다
귀가 움직입니다
그러니까 벽이 나를 생포하고 있습니까
그 벽이 그 벽은 맞습니까
가장 가까운 벽으로 다가가 녹음하기 시작합니다
재생되지 않을 소리가 허물을 빠져나갑니다
매미는 벽을 나무라 착각한 채 울고 있다
<어딘지 흐르고 붉은>
흠집을 심었다 심었던 자리를 메우고 피부를 덮었다 그러나 유실되고 있습니다 비가 점차 긁어내고 있었다 나뭇잎이 떨어져 바닥에 안착한다
내게 선을 긋는다면 나의 유동은 무엇의 나열입니까 분절되는 지점에서 정차한다 역마다 길섶에는 선홍빛 짐승들이 피어났고 역무원이 손을 흔들고 있다 죽은 것들에서는 물이 나옵니다 나는
나를 잇대어 봉합합니다 시작된 곳과 멀어지는 곳은 서로 관여하고 있다 긴 터널을 지날 때 내 형체와 터널 사이 부유하는 어둠을 떠올린다 그곳에 꽃을 심어듭니다 나의 유동이
너의 나열이라면 누가 피부를 긁고 있습니까 흠집은 고체로 엉기기 시작한다 너는 나의 유동에 물을 얹는다
<두 번째 자연>
슬픔이 야생했다 그곳에서 가지가 두꺼워졌고 잎이 자라났다 그늘은 무성해졌다 그가 군락을 이루자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갈라진 노을 사이로 새들이 빠져나오고 있었다 그는 내색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러니 그의 표정은 벗겨지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울타리를 쳤고 눈물을 솎아냈다 그러나 그는 짐승이기도 합니까 양떼구름이 정박해 있었다 사람들은 잇따라 절벽을 지었고 창문을 뚫었다 모두들 열중했다 사고가 일어나기 전까지 어느 날 폭발이 어두운 밤으로 흘러 들어가고 있었다 사람들은 도망하고 있었다 그늘에 치여 울타리가 허물어졌다 두 번째 야생이 시작됐습니다 그러니 그의 야생은 정말 슬퍼진 겁니까 분진이 가라앉고 있었다 소나기가 뛰쳐나갔다가 돌아오지 않는다 그는 머리위에 한 줌 흙을 바르고 기다렸다 눈물에도 소리가 났습니다
<시월>
복도는 어디까지 나를 바래다줍니까
난간에서는 쇳소리가 났고 저녁은 멀리서부터 변경되고 있었다
달력은 나를 지치게 합니다
당분간 시작될 겁니다
통로 안으로 나방이 피로를 흘리고 다녔다
나방이 눈꺼풀이 되어 내려앉습니다
무늬가 흐트러질 때
가루에서는 무색이 묻어납니다
날개가 접히는 곳에서 나는 다른 방향을 셈합니다
시월에는 내가 잘 자라날 수 있는 조건에 대해 오래 생각했지만
내가 설정한 계절은 다른 계절에 파묻히고 있습니다
복도는 온실 같지 않습니까
끝나도록 반성을 연습했어요
<강이 뒤를 돌아보는>
여기는 습하고 단단하다 물안개가 정체하면 발바닥을 흘러두고 떠난다 사라진다 바람 불고 강냄새는 어디서 배회합니까 갈대 사이 우리가 혼숙한 곳 꿈으로 새겨주고 잊는다 잠은 의식을 남기지 않습니다 의식은 표식을 남깁니다 나의 표식은 내 등부터 핥아 녹인다 바람은 뒤를 돌아보고 삼나무 근방에선 나무 쌓는 소리가 난다 돌을 조각한다 조경이 시작되는
동원된 강에서 물새가 날아갑니다
강변에 누군가 숲을 꽂아두었습니다
강의 표식은 강을 드러내지 않는다
<누에>
누에고치 냄새가 난다 지하로 여자가 내려간다 유리창으로 다른 유리창이 반사되고 건물을 자생한다 여자는 깊숙이 내려간다 계단 아래로 깊이가 위치되는 곳으로 누에가 실을 토해낸다 실이 몸을 쌓고 있습니다 문은 집요하게 반복된다 여자는 내려가고 계단은 발에서 비롯된다 누에는 외피를 불린다 두터워진다 바래지고 지하의 빛은 어둠에 기대어 있다 그녀의 장소는 얼마나 깊습니까 추적된 몸 안으로 들어간다 여자가 계속해서 집을 짓고 있다
<들>
우리는 자욱하고 어디서든 적발된다 들에서 탑과 탑 사이를 이루고 흐리는 송천 속에서 이맘때는 감이 익어가는 날이다 그럴 때 우리는 감전에 근접합니까 들은 번진다 깊어지고 가을은 한통속으로 다른 계절과 잇닿는다 흐려진다 그럴 때 우리는 흐릅니까 그러나 흐르는 동시에 흘립니다 너와 나 사이로 수목이 있고 수목을 지키는 노인이 있다 생물의 무늬는 연갈색으로 천막과 함께 짙어지고 천막엔 점성이 가득하다 달라붙는 창문 사이로 안개가 전파를 그을린다 새가 통신을 문 채 머뭇거린다 그럴 때 공급을 죄고 기다린다면 우리가 들에서 혼선되려는 각오로 이맘때는 채 수확하지 못한 감들이 떨어져 있다 농성하기 시작한다
<확성의 밤>
*
자작나무 숲으로 걸어 들어간 밤은 나오지 않았다 밤의 피부에서 흰털들이 곤두섰고 누군가는 천막을 쳤다 누군가는 밤을 지켰고 갓 찍힌 발자국은 예민하게 떨고 있었다 한편으로 막차가 지나갔다 짐승들은 기침을 했고 소리들이 몰려들었다 큰 나무는 팔 벌려 울고 있었다 너는 천막안으로 간신히 착지한 곤충의 날개
충혈된 밤으로 새가
번지고 그 위로
떨어지는 이파리
몰래 버려둔 횃불에서
미끄러져 나오는 해명들
확성기가 시간을 해제한다
산불이 천막 틈새로 가늘게 새어 들어올 때
너는 담요였다 나를 싸서 들쳐 메고 있었다 환기통 같은 꿈속으로 걸어 들어가고 있었다 밤은 낮의 후유증 같아 퍼렇게 멍이 들고 있었다 잠이 서서히 와해되고 있어 깨고 나면 나는 담요를 걷어차는 습관을 지니고 있었다
*
너는 천막을 열었습니다
여전히 꿈속입니까
사람들은 기침을 했습니다 팔 벌린 채
무언가 해명을 하면서
울고 있었습니다
무엇을 보았습니까
저는 덮었습니다 산불을
다른 얼굴이었지만 분명 제가 아는 그 사람을
이파리처럼
담요처럼
덮고
또 덮었습니다
여기가 어디인지는 아십니까
밤이었습니다 지금도
울리는 것 같은
*
깨어났을 땐 이미 어두웠다 어디론가 가려고 막차를 탔다 얼마 후 나는 왠지 모르게 안심했는데 방금 어딘지 낯익은 숲을 지나친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