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태운 - 가을이 오고 있었고

사무엘럽 2020. 11. 24. 07:09

 

산책하는 사람에게:안태운 시집, 문학과지성사, 9788932037974, 안태운 저 감은 눈이 내 얼굴을:안태운 시집, 민음사

 

 

 가을이 왔네

 가을이 왔지

 두 사람은 가을이 왔다고 말한다

 마침 너도 와서

 가을이 왔다고, 말하려다가 문득

 작년에는 가을에 대한 시를 쓰려고 했는데

 쓰지 못한 채 가을이 왔어

 가을은 쓰지 못한 가을이면서도 다시 돌아왔지

 그렇게 올 수 있었다고

 나란히 두 사람 옆에 서서

 너는 가을이 텅 빈 것 같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말하려다가

 이걸로 시를 쓰자

 정말로 가을은 텅 비어 있는 것 같으니

 텅 비어서 가을이 되어버린 것 같으니......

 하지만 이미 누군가 했던 표현 같아서

 너는 더 이상 가을이 텅 비었다고 생각하지도 텅 빈 다른 것들을 떠올려보지도 않았다

 그러면서 가을은 왔지

 가을에 대하여 그래도 너는 어떤 말을 할 수 있을까

 텅 빈 것이 아닌 가을에 대하여

 너는 어떤 모습을 쓸 수 있을지 생각해보다가 마침

 두 사람에게는 물어볼 수 있었지

 가을은?

 가을, 하면 떠오르는 것은?

 두 사람은 웃으며,

 휘파람

 귀뚜라미

 해일 그리고 빛

 고궁과 칼

 방목장과 노을......

 묘약

 농담과 뺨

 찌르레기

 베란다, 비누와 천사

 누룩

 오렌지와 일기장......

 두 사람은 웃었는데 

 나열하는 것들은 점점 가을과 멀어지는군요

 가을이 아니라도 좋을 것들이군요

 서로 말하고 말하는 걸로 연상하다가 너를 바라봤지

 너도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어

 그것들로 시를 생각해내려 하면서

 이윽고 두 사람 중 한 사람은 떠나간다고, 안녕

 떠나가며 남은 가을을 잘 보내라고 말했는데

 그렇게 가을이 되었고

 지금 너는 그리고 남은 한 사람과 서 있었다

 곧 올 사람을 기다리면서

 너는 가을이 오다가 말았다고

 그리고 남은 한 사람은 가을은 이미 사라져버렸다고 말하고 웃고

 오지 않은 것들과 사라져버린 것들은 도처에 널려 있다고

 하지만 그런 것들로 쓸 수 있었나

 너는 쓸 수는 없었고

 그런 건 말할 수 없는 가을이다

 언제든 사라지고 없는 가을에 대한 가을이다

 지나간 가을에 대한 미래의 가을이다

 그렇게 가을에 대하여 미래의 너도 쓸 수는 없을 것 같고

 다시 가을은 왔지

 미래도 오고 있었고

 미래의 가을에

 나는 너와, 그리고 남은 한 사람을 어쩌면 바라볼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너와, 그리고 남은 한 사람을 두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는 못했지

 나는 텅 빈 나를 두 사람이라고 생각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