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마경] 문병
문수가 문병을 간다
그래서 세존은 문수사리에게 말하였다.
"문수사리여, 그대가 리차비의 비말라키르티의 병 위문을 가라."
문수사리도 또 말했다.
"세존이시여, 비말라키르티는 상종하기 어려운 사람으로 미묘한 이치에 대해 변설을 자랑하는 사람입니다. 반대 표현이든 만족한 말이든 교묘하게 말하며, 그의 변재를 방해할 수는 없습니다. 어떤 사람에 대해서도 노여움을 품지 않는 지혜를 가진 사람으로서, 보살이 하는 일은 모두 완성되어 있고, 모든 보살과 모든 불타의 비밀스럽고 심오한 곳에까지 들어가 있습니다. 온갖 마귀의 궁전을 뒤엎는 데 능숙하며, 유희하며 방편이나 지혜로부터 초월해 있습니다. 무이이며, 순수한 법계인 최고의 경지에 도달하여 하나의 상으로써 꾸며져 있는 법계를, 무량한 상으로써 꾸미는 것처럼 설법을 교묘하게 합니다. 여러 가지 중생의 기근에 꾸밈을 얻게 하는 일에 능숙하고, 좋은 방편을 잘 알고 있어 질문에 대해서는 결정적인 대답을 합니다. 이쪽의 빈약한 갑옷을 가지고 그를 만족시킬 수는 없습니다. 그러하오나, 불타의 거룩하신 분부이므로 뜻에 따라 그가 있는 곳으로 가서 병을 위문하고, 있는 그대로, 또 자신의 능력대로 담론해 보겠습니다."
그리하여 이 모임에 있던 보살들, 대성문들, 제석천, 범천, 여러 호세신들, 천자와 천녀들은 이렇게 생각했다.
'문수사리와 그 고귀한 선비와 두 사람이 이야기하는 것이므로, 그것은 반드시 큰 회담이 될 것이며, 법음을 힘차게 올릴 것이 틀림없다.'
그리하여 8천의 보살, 500의 성문, 제석천, 범천, 많은 호세신, 많은 백천의 하늘 아들들이 법을 들으려고 문수사리의 뒤를 따르고, 문수사리는 이들 모두에게 둘러싸여 그 선두가 되어 바이샬리의 거리로 들어갔다.
텅 빈 방
이때, 리차비의 비말라키르티는 다음과 같이 생각했다.
'문수사리가 많은 사람에게 둘러싸여 오고 있으니 신통으로써 내 거실을 비워 두리라.'
그리고 신통력으로 방을 텅 비게 했으므로 저기에는 문을 지키는 사람도 없고 비말라키르티가 병이라 핑계하고 누워 있던 평상 하나를 빼고는 그 밖에 평상도 의자도 자리도 모두 감춰져 보이지 않게 되었다.
문수사리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비말라키르티의 저택으로 가까이 와서 그 안으로 들어가 보니 그 집은 텅 비어 잇었다. 거기에는 방문을 지키는 사람이 없고, 비말라키르티가 앓고 누워 있는 침상 하나만 있을 뿐으로 그 밖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문수사리와 비말라키르티의 문답
그때 비말라키르티는 문수사리를 보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문수사리여, 잘 오셨습니다. 참으로 잘 오셨습니다. 한 번도 오지 않더니 이제야 오셨군요. 일찍이 뵙지도 듣지도 못했는데 이제야 만나게 되었습니다."
문수사리가 말했다.
가장이여, 당신이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일찍이 왔었더라면 지금 또다시 오는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이미 간 것은 또다시 가는 일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아직 오지 않은 것은 오는 것을 알 수 없고, 지나간 것도 가는 것은 알 수 없으며, 보인 것이 두 번 다시 보이는 일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건 그렇고 고귀한 선비여, 병고를 견딜 수 있습니까? 건강하십니까? 몸이 불편하지 않습니까? 병환은 가벼워졌습니까? 이제 더하지는 않습니까? 세존께서도, 괴로움이 크지는 않은가, 병은 대단치는 않은가, 조금 나쁠 뿐인가, 앉고 서기가 수월해졌는가, 기운이 돌아섰는가, 힘은 있는가, 기분은 좋은가, 나쁜 데가 있는가, 마음 편히 지내고 있는가 하고 물으셨습니다. 가장이여, 당신의 이 병은 무엇에서 생겼으며, 이제 얼마나 지났습니까. 어떤 상태이며 언제쯤 낫겠습니까?"
비말라키르티가 대답했다.
"문수사리여, 무지가 남아 있는 한, 존재에의 애착이 있는 한, 나의 이 병도 그만큼 계속됩니다. 모든 중생이 앓고 있는 한, 그만큼 내 병도 계속됩니다. 만일 일체 중생의 병이 사라지면 내 병도 사라질 것입니다. 왜냐하면 문수사리여, 보살이 윤회 속에 있는 것은, 중생에게 그 원인이 있고, 병은 이 윤회가 그 원인이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모든 중생이 병에서 떠나 있게 되면 그때는 보살도 병이 없게끔 될 것입니다. 예를 들면 부잣집 외동아들이 병이 났을 때, 그 병 때문에 양친도 또 병이 난 것과 같은 것입니다. 외동아들에게 병이 났을 때, 그 병 때문에 양친도 또 병이 난 것과 같은 것입니다. 외동아들에게 병이 없어지지 않는 한 양친도 계속 고민할 것입니다. 문수사리여, 그와 마찬가지로 보살은 모든 중생을 외아들처럼 사랑하기 때문에 중생이 모두 병들어 있는 한 그도 병들어 있고 중생에게 병이 없어졌을 때 그에게도 병이 없어지게 됩니다. 문수사리여, 이 병은 무엇에서 생겼느냐고 물으셨는데, 보살이 병든 것은 대비 때문에 생긴 것입니다."
모든 것의 공성
문수사리가 말했다.
"가장이여, 당신 집은 텅 비어 있는데 가족은 계시지 않습니까?"
비말라키르티가 대답했다.
"문수사리여, 불국토도 다 텅 빈 것입니다."
문수사리가 물었다.
"어째서 빈 것입니까?"
비말라키르티가 대답했다.
"텅 빈 그것으로서 빈 것입니다."
문수사리가 물었다.
"공성 속에 뭐가 또 빈 것이 있습니까?"
비말라키르티가 대답했다.
"인식하는 것이, 공성으로서 공인 것입니다."
문수사리가 물었다.
"공성이 인식될 수 있는 것입니까?"
비말라키르티가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 분별은 또 공으로서, 공성이 공성을 인식하는 일은 없습니다."
문수사리가 물었다.
"예순두 개의 잘못된 생각은 어디서 찾을 수 있습니까?"
비말라키르티가 대답했다.
"여래의 해탈 속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문수사리가 물었다.
"어디서 여래의 해탈은 찾게 되는 것입니까?"
비말라키르티가 대답했다.
"모든 중생의 마음이 처음으로 움직이기 시작하는 곳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문수사리여, 당신은 가족도 없느냐고 물으셨는데, 내 가족이란 것은 모든 마귀와 모든 이론자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마귀는 생사의 윤회를 찬양하는 것이고, 윤회는 또 보살이 이것을 버리는 일이 없이 가족으로 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이론자는 그릇된 생각을 찬양하는 사람들인데, 보살은 일체의 그릇된 견해에서 이탈하려고는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체의 마귀와 이론자가 내 가족인 것입니다."
병과 그 위문
문수사리가 물었다.
"가장이여, 당신의 병은 어떠한 것입니까?"
비말라키르티가 대답했다.
"모양도 없고 보이지도 않습니다."
문수사리가 물었다.
"그 병은 몸에 관한 것입니까, 아니면 마음에 따른 것입니까?"
비말라키르티가 대답했다.
"몸은 이탈해 있으므로 몸에 관한 것은 아닙니다. 마음은 헛그림자 같은 것이므로 마음에 따른 것도 아닙니다."
문수사리가 물었다.
"가장이여, 땅 물 불 바람의 네 요소가 몸을 형성하고 있는데, 이 네 요소 가운데 어느 것이 병들어 있습니까?"
비말라키르티가 대답했다.
"이 병은 땅 요소의 병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땅을 떠나 있지도 않습니다. 물 불 바람의 요소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중생의 병은 사대로부터 생깁니다. 일체 중생의 요소가 병들어 있으면, 그같은 요소가 내 경우에도 병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때 문수사리가 비말라키르티에게 물었습니다.
"그런데 보살은 어떻게 보살의 병을 위문해야 합니까?"
비말라키르티가 대답했다.
"몸은 무상하다고 말하며 위문할 일입니다. 그러나 그 몸을 싫어하고 욕을 떠나는 것으로 위문해서는 안 됩니다. 몸은 괴로운 것이지만 그러나 열반의 즐거움으로써 위문해서는 안 됩니다. 몸은 무아이지만 사람 사람을 성숙시키는 것으로써 위문해야 합니다. 몸은 공적입니다. 그러나 철저한 공적으로써 위문해서는 안 됩니다. 악행을 모조리 씻어 보이는 것으로써 위문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죄가 옮겨 지나갔다고 말하며 위문해서는 안 됩니다. 스스로 병을 앎으로써 다른 사람의 병을 안타까워하고, 전세의 고를 생각해 내고 중생의 이익을 도모하는 것을 생각해 내며, 선근을 쌓아 본래 청정하고 애욕이 없으며, 항상 정진에 노력하고 있는 것이므로, 모든 병을 없애는 의왕이 될 것이다, 라고 말하듯이 위문해야 합니다. 이상과 같이 보살은 보살의 병을 위문해야 합니다."
병에 대한 통찰
문수사리가 물었다.
"가장이여, 병에 걸려 있는 보살은 어떻게 자기 마음을 통찰합니까?"
비말라키르티가 대답했다.
"문수사리여, 병에 걸려 있는 보살은 다음과 같이 자기 마음을 통찰합니다. 지금 이 병은 모두 과거세의 망상, 전도, 갖가지 번뇌에서 생기는 것입니다. 본질적으로 말하면 신체 속에는 이 병을 앓을 만한 실제의 법이 없는 것입니다. 이 몸은 사대원소로 되어 있지만, 이들 원소 가운데는 주재자도 없고 창조자도 없기 때문입니다. 이 몸은 무아이며, 집착된 나 이외에는 병에 걸리는 것과 같은 것은, 최고의 진리인 입장에선 인정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은 집착을 없애고 병의 근본적인 인식에 서겠다고 하듯이 나에 집착하는 관념을 끊고, 법의 관념을 일으켜야만 됩니다. 이 몸은 많은 법이 모인 것으로, 몸이 생겼을 경우에도 실은 법이 생기는 것뿐이며, 없어졌을 경우에도 법이 없어진 것에 불과합니다. 그들 법은 서로 감수하고 지각하는 일이 없고 그들 법이 생겼을 때에도 나는 생긴다고는 생각하지 않으며, 없어질 때에도 나는 없어진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그 병에 걸려 있는 보살은 또 법의 관념을 완전히 알기 위해 다음과 같이 생각해야만 됩니다. 내가 위에 말한 것과 같은 법의 관념을 가진다고 하면, 이것 또한 도착이며 도착은 곧 큰 병과 다를 것이 없다. 그 병을 나는 벗어나야 하며 병을 끊기 위해 정진에 힘쓰지 않으면 안된다고. 그 경우 병을 끊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즉 내가 있다고 하는 생각, 내것이다, 라는 생각을 끊는 것입니다. 그것은 무엇을 말하느냐 하면, 즉 안에서도 밖에서도 움직임이 없는 것입니다. 안에서도 밖에서도 움직임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은 즉 평등성에 서 있기 때문에 거기에 움직여 흔들리는 일이 없는 것입니다. 평등성이란 어떤 것인가. 나의 평등성을 비롯하여 열반의 평등성에 이르기까지를 말합니다.
왜냐하면, 자아도 열반도 둘이 다 공이기 때문입니다. 이 둘이 어떻게 공인가에 있어서는 개념적으로 설명된 이 둘이 공인 것이며 그것들은 어느 것이나 실체로서 완성된 것은 아닙니다. 이와 같이 평등성을 볼 때, 그는 병과 공성을 다른 것으로 하지 않습니다. 병이야말로 공인 것입니다.
병을 느낀다고 하는 것도, 감수 없이 감수하는 것이다, 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따라서 감수가 없어진 것을 깨달음이라고 생각해도 안 됩니다. 불법이 완성된 때에는 감수하는 것과 감수되는 것과의 두 가지 감수는 버려집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지옥과 같은 악취에 태어나 있는 일체 중생에 대해 대자비심이 일어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이들 중생에 대해서는 바르게 마음을 통찰하여 병을 제거시키도록 유도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들에 있어서, 어떤 법도 덧붙이거나 떼어 내거나 해서는 안 됩니다. 다만 법이 생기는 근본을 알리기 위해 그들에게 설법을 해야 할 것입니다."
병의 근원
"그 병의 근본이란 무엇인가. 대상을 파악하는 것이 근본입니다. 대상으로 파악된 것이 있는 한 그것이 병의 근본입니다. 무엇을 파악하고 있느냐하면 온세계를 대상으로 파악하고 있는 것입니다. 대상을 파악한다는, 병의 근본을 안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파악하지 않는 것, 보지 않는 것입니다. 보지 않는다는 것은 대상을 갖지 않는 것이며, 무엇을 보지 않느냐 하면, 그것은 안에 있는 주관과 밖에 있는 객관, 이 두 관을 보지 않는 것으로 그렇기 때문에 보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문수사리여, 이같이 병에 걸려 있는 보살은 늙고, 병들고, 죽고, 나고 하는 것을 끊기 위해 자기 마음을 통찰해야 합니다. 문수사리여, 모든 보살의 병은 이와 같은 것으로서 만일 그렇지 않다면, 그의 지금까지의 노력은 허사가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마치 그의 적을 쳐서 이김으로써 용자라고 불리듯이, 늙고 병들고 죽는 괴로움을 가라앉히는 것에 의해 보살이라 불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 병에 걸려 있는 보살은 자기 병이 진실된 것이 아니고, 실재한 것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로, 모든 중생의 병도 또 진실된 것이 아니고 실재한 것이 아니라고 관찰해야 합니다. 이같이 관찰할 때, 중생에 대한 대비심을 일으키는 것은 공덕을 목표로 하는 것이 되지 않습니다. 밖으로부터 우연히 덧붙게 된 번뇌를 끊기 위해 노력하며 중생에 대해 대비심을 일으키는 것은, 그것과는 유를 달리합니다. 그것은 어째서일까요. 공덕을 안중에 둔 대비심이라면 보살은 생존을 되풀이하는 것에 싫증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대비심의 공덕을 안중에 두지 않고 일어날 때 보살은 다시 태어나는 것에 지겨움을 느끼지 않습니다. 보살은 공덕을 목표로 하는 생각을 일으켜, 그것을 몸에 지니고 윤회의 이 세상에 태어나는 것이 아니고, 그같은 마음을 일으키는 일 없이 다시 태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해탈된 그대로 태어나는 것, 해탈된 채로 일어나는 것입니다. 해탈된 채로 생겨나고 일어나기 때문에, 중생을 속박하고 있는 고삐를 푸는 것과 같은 설법을 행할 능력이 있습니다.
즉 세존께서는, '스스로 속박되어 있으면서 남을 고삐로부터 풀어 놓는 것은 불가능하다. 스스로 해탈함으로써 남을 해방시킬 수 있는 것이 도리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보살은 해탈해 있음이 틀림없으므로, 윤회 속에서 태어나더라도 속박되어 있을 리가 없습니다."
지혜와 방편
"그 경우 보살에 있어서의 속박이란 무엇인가, 해탈이란 무엇인가. 방편을 갖지 못한 채 유의 윤회에서 해탈하고 마는 것은 보살에 있어서의 속박인 것입니다. 반대로 방편을 갖추고 유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 해탈입니다. 방편을 갖지 못하고 선정과 삼매와 명상 같은 것에 맛을 붙이는 것은 보살의 속박이며, 방편을 가지고 선정과 삼매의 맛을 맛보는 것이 해탈입니다.
방편으로 뒷받침되어 있지 않은 지혜는 속박이며, 방편으로 뒷받침된 지혜가 해탈입니다. 지혜의 뒷받침이 없는 방편은 속박이며, 지혜에 뒷받침된 방편이 해탈입니다. 그 가운데, 방편에 뒷받침되어 있지 않은 지혜가 속박이란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즉 공성, 무상, 무원이라는 이론에 대해서는 통찰이 있으면서, 상호와 불국토의 꾸밈과 중생을 성숙시키는 것에 대해서는 통찰이 없는 것이, 방편의 뒷받침이 없는 지혜이며 속박입니다. 또 방편에 뒷받침된 지혜가 해탈이라는 것은, 상호와 불국토의 꾸밈과 중생을 성숙시키는 것에 대한 통찰이 있고, 동시에 공, 무상, 무원에 익숙해 있는 것입니다. 지혜의 뒷받침이 없는 방편이 속박이라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즉, 모든 그릇된 지견을 가지고 번뇌가 일어나며 번뇌의 잔재가 있고 집착이 있고, 노여움 가운데 있으며, 그리고 모든 선근을 쌓아도 그것을 깨달음의 방향으로는 돌리지 않는 것, 이것이 지혜에 뒷받침되지 않은 방편이며 속박입니다. 즉 모든 지견과 번뇌가 일어나는 것이나 번뇌의 잔재, 집착, 노여움을 끊고 선근을 쌓아 그 모든 것을 깨달음에 돌리면서 그것을 자랑으로 알지 않는 것, 이것이 보살의 지혜에 뒷받침된 방편이요, 해탈입니다.
문수사리여, 병에 걸려 있는 보살은 모든 법에 있어서 다음과 같이 통찰해야 합니다. 몸과 마음과 병은 어느 것이나 무상이요 고요 공이요 무아라고 이해하는 것이 자기의 지혜이다. 또 몸의 병을 완전히 없애고 이 세상에 태어나는 것이 아니고, 끊임없는 윤회의 흐름 속에 있으면서 중생의 이익을 위해 종사하는 것이 자신의 방편이다. 다시 또 몸과 마음과 병, 그 어느 것이 다른 것보다 새로운 것도 없고 낡은 것도 없다고 생각하는 것, 이것이 자신의 지혜이다. 몸도 마음도 병도 적멸시키려 하지 않는 것, 이것이 그 방편이다 하고 말입니다.
문수사리여, 병에 걸려 있는 보살은 위에 말한 것과 같이 자기 마음을 통찰해야 할 일이지만, 그러나 그는 통찰하는 일이 있다든가 없다든가 하는 것에 안주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만일 통찰하지 않는 것에 안주하면 그것은 평범하고 어리석은 사람의 태도입니다. 만일 통찰하는 것에 안주하면 그것은 성문의 태도입니다. 그러므로 보살은 통찰하는 것에도 통찰하지 않는 것에도, 안주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에 안주하지 않는다는 것이 보살의 경지입니다."
보살의 경지
"그것은 범부의 경지도 아니고 성현의 경지도 아닌, 이것이 바로 보살의 경지입니다. 윤회를 경지로 하고 그리고 번뇌의 경지가 아닌, 이것이 보살의 경지입니다. 열반을 깨닫는 것을 경지로 하고 그리고 결코 완전한 열반에는 들어가지 않는 경지, 이것이 보살의 경지입니다. 사마를 현출하는 경지에 있으면서 모든 마의 영역을 초월한 경지, 이것이 보살의 경지입니다. 일체지의 지를 구하는 경지에 있으면서 정당한 시기가 아니면 굳이 그것을 구하지 않는 경지, 이것이 보살의 경지입니다. 사성제의 지를 경지로 하고 그리고 정당한 때가 오지 않으면 그것을 깨닫지 않는 경지, 이것이 보살의 경지입니다. 내관을 경지로 하고 그리고 마음대로 유의 세계에 생을 갖는 경지, 이것이 보살의 경지입니다. 사물의 불생을 관찰하는 경지에 있으면서 구극결정의 깨달음에는 들어가지 않는 경지, 이것이 보살의 경지입니다. 연기를 경지로 하며 그리고 모든 지견을 경지로 하지 않는, 이것이 보살의 경지입니다.
사람이 들끓는 장소를 경지로 하며, 그리고 번뇌와 그 잔재의 경지는 아닌, 이것이 보살의 경지입니다. 고요한 장소를 경지로 하고, 그리고 몸도 마음도 없애버리지 않는 경지, 이것이 보살의 경지입니다. 삼계를 경지로 하고, 그리고 법계를 떨어져 있지 않는 경지, 이것이 보살의 경지입니다. 공성을 경지로 하면서 온갖 종류의 덕을 구하는 경지, 이것이 보살의 경지입니다. 무상을 경지로 하며, 그리고 사람을 해탈시키는 것을 계획하고 생각하는 경지, 이것이 보살의 경지입니다. 무원을 경지로 하며, 그리고 마음대로 유의 세계에 몸을 나타내는 원을 갖는 경지, 이것이 보살의 경지입니다. 작위가 없는 경지, 그리고 모든 선근이 끊임없이 만들어지는 경지, 이것이 보살의 경지입니다. 여섯 가지 피안에의 행을 경지로 하며, 그리고 모든 사람의 마음과 행위의 피안에 도달하는 경지, 이것이 보살의 경지입니다. 여섯 가지 신통을 경지로 하면서 번뇌를 단멸하지 않는 경지, 이것이 보살의 경지입니다. 바른 법의 건설을 경지로 하고, 사도를 대상으로 하지 않는 경지, 이것이 보살의 경지입니다. 네 가지 무한한 마음을 경지로 하면서 브라흐마의 하늘나라에 태어난다는 결과를 기대하지 않는 경지, 이것이 보살의 경지입니다.
여섯 가지 사념의 경지이기는 하나 번뇌의 누출의 경지는 아닌, 이것이 보살의 경지입니다. 선정과 삼매와 명상을 경지로 하면서 삼매와 명상의 힘으로 사는 것이 아닌 경지, 이것이 보살의 경지입니다. 신 수 심 법에 관하여 바른 마음을 쓰는 것을 경지로 하면서 몸 감수 마음 법으로부터의 이탈을 경지로 하지 않는, 이것이 보살의 경지입니다. 바른 노력을 경지로 하면서 선과 악과의 차별을 보지 않는 경지, 이것이 보살의 경지입니다. 신통의 기초를 노력하는 것을 경지로 하면서 노력하지 않고 자유롭게 신통을 구사하는 경지, 이것이 보살의 경지입니다. 다섯 기능을 경지로 하면서 모든 사람의 기근의 우열을 알아 구별하는 경지, 이것이 보살의 경지입니다. 다섯 능력에 자신을 두는 것을 경지로 하며 동시에 여래의 십력을 기뻐하는 경지, 이것이 보살의 경지입니다. 깨달음에의 일곱 지분이 완성됨을 경지로 하고 동시에 지의 차별을 아는 일에 교묘한 경지, 이것이 보살의 경지입니다. 바른 행실에 스스로를 두는 것을 경지로 하며, 동시에 사도를 인정하지 않는 것을 경지로 하는, 이것이 보살의 경지입니다.
지관을 돕는 조도의 법을 행하되 결코 적멸에 빠지지 않는 경지, 이것이 보살의 경지입니다. 모든 존재는 불생불멸이라고 알고 따르지만, 상호로써 불신이 꾸며져 완성되는 경지, 이것이 보살의 경지입니다. 성문과 독각으로서의 위의를 나타내는 경지에 있으면서 불법을 버리지 않는 경지, 이것이 보살의 경지입니다. 모든 존재는 본성으로서 청정하다는 것에 맞는 경지에 있으면서 모든 중생의 인연에 따라 행동하는 경지, 이것이 보살의 경지입니다. 불국토에는 모두 파괴의 때도 성립의 때도 없고 허공을 본성으로 하는 것이라고 이해하면서 갖가지로 다양하게 꾸며진 불국토를 나타내 보이는 것을 경지로 하는 것, 이것이 보살의 경지입니다. 불도를 얻고 법륜을 굴리고, 열반에 들었다 할지라도 보살로서의 행함을 버리지 않는 경지, 이것이 보살의 경지입니다."
이렇게 말했을 때, 문수사리 법왕자와 함께 온 대중들 가운데 8천의 천자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