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근 - 가을이 왔다

사무엘럽 2020. 11. 8. 12:25

 

어떻게든 이별:류근 시집, 문학과지성사 상처적 체질, 문학과지성사 함부로 사랑에 속아주는 버릇:류근 산문집, 해냄출판사

 

 

 가을이 왔다

 뒤꿈치를 든 소녀처럼 왔다

 

 하루는 내가 지붕 위에서

 아직 붉게 달아오른 대못을 박고 있을 때

 길 건너 은행나무에서 고요히 숨을 거두는

 몇 잎의 발자국들을 보았다

 사람들은 황급히 길에 오르고

 아직 바람에 들지 못한 열매들은

 지구에 집중된 중력들을 끌어모으기 시작했다

 우주의 가을이 지상에 다 모였으므로

 내 흩어진 잔뼈들도 홀연 귀가를 생각했을까

 문을 열고 저녁을 바라보면 갑자기 불안해져서

 어느 등불 아래로든 호명되고 싶었다

 이마가 붉어진 여자를 한번 바라보고

 어떤 언어도 베풀지 않는 것은 가을이

 이제 막 시작됐다는 뜻

 안경을 벗고 정류장에서 조금 기다리는 일이

 그런대로 스스로에게 납득이 된다는 뜻

 나는 식탁에서 검은 옛날의 소설을 다 읽고

 또 옛날의 사람을 생각하고

 오늘의 불안과

 미래로 가는 단념 같은 것을 생각한다

 가을이 내게서 데려갈 것들을 생각한다

 가을이 왔다 처음 담을 넘은 심장처럼

 덜컹거리며 빠르게,

 

 그 누구도 따르지 못할 망설임으로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