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유원 - 1시 11시
비가 내린다
0시 주위로 모여드는 1시나 11시 들같이
이 비는 자꾸 내린다
비에 젖는 긴 풀처럼
장대비는 아니지만
길게 자라나는 비
0시 주위로 자라나는 1시나 11시 들같이
긴 비가 내린다
아주 긴 시간 동안
이 비는 나와 전적으로 무관했다
나를 쳐다보지도 않고 내리는 이 비는
0시의 좌우를 적셔 대는 비
이 비는 시도 때도 없이 내린다
내가 좌지우지하지 못하는 비가
나를 좌지우지하지 못하는 비로 남아
오로지 내리고 있다는 사실
나의 슬픔은 내리는 이 비와는 무관하게 슬프고
내리는 이 비는 나의 슬픔과는 무관하게 내린다는 사실이 무한해져서
그 무한한 간격 속으로
거의 온갖 것들이 끼어들고 있을 뿐
그 틈은 무척이나 고요해
너와 나 사이를 제집처럼 들락날락거리고 있을 뿐
바람에 가볍게 흔들리는 그것을 사이에 두고서
반드시 11시를 거쳐야만 하는 0시처럼
나는 깨어 있고
이미 0시를 거쳐 온 1시처럼
너는 깨어 있다
0시처럼 거기 선 채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는 빗속에서
우리는 서로 각자의 위치에서 빗소리가 열어 놓은 세상을 듣고 있고
그 사이엔 무엇이든 들어올 수 있고
그건 모두 우리의 것이다
이 비는 소리를 잘못 낼까 두려워하지 않고 내리고
지금 이 장면을 꼬깃꼬깃 접어 주머니 속에 쑤셔 넣으면
바지까지 홀딱 젖어 버리겠지
아마 젖은 채로 서서
젖은 데가 마르길 기다릴 거다
묵직한 데가 가벼워질 때까지
그러나 좌우지간 지금은 1시와 11시
사이에 멍하니 서 있는
0시처럼 비가 내리고
0시의 물웅덩이
그것은 이미 슬픔으로 흥건한데
그 위로 퍼져 나가는 끝없는 동심원을
0시의 좌우로 돋아난 1시나 11시 들이
끝없이 가려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