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유원 - 전국에 비

사무엘럽 2020. 11. 23. 07:51

 

밀크북_2 세상의 모든 최대화, One color | One Size@1 이 왕관이 나는 마음에 드네 - 황유원 시집 (현대문학 핀 시리즈 시인선 14)[ 양장 ] 예언자, 민음사 일러스트 모비 딕 슬픔은 날개 달린 것:맥스 포터 장편소설, 문학동네

 

 

 어둔 방

 창밖으로 들려오는 자욱한 빗소리 속에서

 나는 기타를 치고

 기타는 허공에

 나무 한 그루 심어 놓는다

 기타의 목질이 허공에서 축축이 젖어 가는 사이

 나무는 비를 맞아 무럭무럭 자라나고

 우리는 그 아래서 비를 그으며

 젖은 머릴 말리며 다시

 기타를 친다

 내가 기타를 치면 참

 평화롭다고 너는 말하지

 나는 고작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틀렸는지나 생각할 뿐인데 너는 그게

 평화롭다고 말하고 진심으로 평화로워지지

 나는 어리둥절해지고

 내가 치고도 듣지 못한 음악을 너의 입으로 전해 듣고서야

 평화로워진다 오래된 나무 한 그루처럼 

 참 쉬운 평화

 그러나 네가 없으면 도래하지 않는

 너로 인해 듣는 참 평화

 어쩌면 이 모든 건

 규칙적인 비의 리듬이 가져다준 착각일 뿐

 풍부해진 대기가 소리의 울림들을 한껏 껴안고선

 공중에 잠시 머물고 있는 것일 뿐이라고 말해 보지만

 말해 본들

 이미 평화는 왔고

 이유 따윈 중요치 않다

 이미 전국은 무수한 빗소리를 거느리고 있고

 오랜 사람이 찾지 않은 숲 냄새 속에서

 방은 여전히 어두운 채였는데

 어느덧 혼자 남겨진 내가

 그곳에서 듣는 빗소리

 열린 창 하나만으로

 씨앗 속 세상에서

 씨앗 밖 세상을 듣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