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유원 - 밤의 황량한 목록들

사무엘럽 2020. 11. 22. 20:01

 

밀크북_2 세상의 모든 최대화, One color | One Size@1 이 왕관이 나는 마음에 드네 - 황유원 시집 (현대문학 핀 시리즈 시인선 14)[ 양장 ] 예언자, 민음사 일러스트 모비 딕 슬픔은 날개 달린 것:맥스 포터 장편소설, 문학동네

 

 

 도끼 삶은 물을 마시고 전진하면

 도처에서 쪼개진다

 네모에서 세모로

 실체와 속성으로

 도끼로 내려찍는다

 회상과 반향

 도끼가 목적지에 도달할 때 내는 소리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도끼가 목적지에 도달할 때 사용되는 수단의 물리력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고

 도끼는 바로 거기로 가 내려찍힌다

 거기가 도달해야 할 유일무이한 목적지라는 듯

 알루미늄과 잉크로 쪼개진다

 물과 향기로

 피와 살과 뼈로도 쪼개지고

 개피 개고기 개뼉따구와는 도통 구분되지 않을 것이지만

 나는 아침부터 도끼날을 갈았으므로

 이 도끼는 거침없을 것이고

 잘하면 영혼과 육신으로도 쪼개질 것이다

 참과 거짓으로 쪼개지는 말

 거짓은 점차 의혹과 불안으로

 하품과 서가와 냉장고를 끊임없이 왔다 갔다 하는 저 영혼을 도무지

 사랑하지 않을 수 없고

 도끼 삶은 물을 마당에 한 번 휙 뿌리고 나자

 겨울이었다

 빈 밤하늘

 일개 연대 규모의 병력이 낮은 포복을 한 채 숨죽여 기다린다

 그 위로 밤새 찬비 내리고

 일개 연대 규모의 병력이 엎드린 채로 모두 얼어 죽어버렸다

 비 오는 소리가 눈 쓰는 소리로 바뀌는 동안

 자로 대고 칼로 그은 듯

 흑백으로 쪼개져버 버렸구나

 강원 산간에 한파주의보 내리고 나면 

 이건 그냥 한 덩이의 겨울

 더 이상 쪼갤 것 없으면

 도끼는 나무와 쇳덩어리로 쪼개져 버린다

 나무는 오른쪽과 왼쪽으로

 좌우로 천천히 흔들리는 깃발

 그러면 이 문장은 정지한 채

 그곳에서 일제히 왼쪽과 오른쪽이 썩고

 쇳덩어리는 영영 침묵 속으로

 침묵과 썩음이 철커덩,

 합체할 때까지

 재정의하고

 재정의하고

 잘하면 나무와 황금으로도 쪼개질 것이다

 나무는 비를 한껏 빨아들여 거대한 숲으로 번져 가고

 쉬고 난 황금은 더욱 빛을 발하리

 때로 아무것도 기다리지 않음으로써

 무언가 완성되어 가는 중

 이토록 황량한 육신의 목록들과

 가까스로 내질러보는 가늘고 새된 고음이여

 흐리고 때로 비

 흐리고 때로 비

 그리고 밤의 황량한 목록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