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유원 - 공룡 인형

사무엘럽 2020. 11. 21. 19:43

 

밀크북_2 세상의 모든 최대화, One color | One Size@1 이 왕관이 나는 마음에 드네 - 황유원 시집 (현대문학 핀 시리즈 시인선 14)[ 양장 ] 예언자, 민음사 일러스트 모비 딕 슬픔은 날개 달린 것:맥스 포터 장편소설, 문학동네

 

 

 마당은 공룡 인형들로 무너질 듯하다

 한때 지구의 주인이었던 것들이

 이제 작은 고무 인형이 된 채 마당을 걸어다니다 이렇게 문득

 정지해 있는 것이다

 누가 정지 버튼이라도 누른 듯

 더 이상 잡아먹지도

 으르렁거리지도 못하고

 마당에 늘어져 있는 공룡들

 가끔 누가 와서 가지고 논다

 그들에게 목소리와 동작을 부여하는

 아이의 고사리 같은 손과 음성

 공룡의 상상력에 대해서라면 생각해 본 적 없지만

 아마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자신들이 작고 말랑말랑한 고무 인형이 되어

 아이의 몸 빌어 움직이게 될 날이 올 줄은

 아니 어쩌면 알고 있었을까

 마당에 저녁이 오고

 지겨워진 아이가 공룡들 내팽개친 채 자릴 떠나면

 그들은 쓰러진 채 고요하고

 다시 일어설 줄을 모른다

 같은 어둠이지만

 한때는 이불처럼 덮고 자던 어둠이

 이제는 모든 움직임을 잃은 인형들을 덮어 주기 위해 천천히

 마당 위로 깔릴 때

 아이는 조금 늙어 있고

 바람 한 번 불자

 중생대부터 있어 온 은행나무 잎 마당에 떨어진다

 은행나무는 자신이 은행나무 인형이 되는 꼴을 보게 될 날은

 아마 없을 거라고 확신하는 듯하고

 마당은 이 온갖 것들로 인해 잠시

 폐허가 되어 본다

 누가 와 재생 버튼이라도 누르고 간 듯

 폐허가 되어 흘러갔고 

 오래 전이라고도

 오랜 후라고도 말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