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유원 - 달팽이 집을 지읍시다

사무엘럽 2020. 11. 21. 19:39

 

밀크북_2 세상의 모든 최대화, One color | One Size@1 이 왕관이 나는 마음에 드네 - 황유원 시집 (현대문학 핀 시리즈 시인선 14)[ 양장 ] 예언자, 민음사 일러스트 모비 딕 슬픔은 날개 달린 것:맥스 포터 장편소설, 문학동네

 

 

 그러니까 나는 내가 돌아 버린 것들 틈바구니에 있느라 돌아 버린 건지 아니면 나도 원래 그들 중 하나여서 내가 너희들을 더욱 돌아 버리게 한 것들 중 하나였는지 한참을 헷갈리느라 정말이지 아주 돌아 버릴 지경인데......

 

 하루는 몸속에 팽이 하나 돌려 놓고

 

 그 팽이가 쓰러질 때까지 생각해 본다

 

 자꾸만꿈만꾸자는 그 말,

 그 속으로 들어가면

 끝없는 나선계단을 걸어 내려가야 하는 주문처럼

 

 몸속에 팽이를 돌려 놓고

 서서히 거기

 빠져들어 본다

 내 몸 안으로 나를 한 걸음씩 걸어

 들어가게 해 본다

 

 인체의 신비를 모두 파헤치고 난 후

 두려워할 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에 극도로 나른해질 때까지

 

 모든 게 주어진 조건 속에서 일어나는 당연한 일임을 알게 됐을 땐

 팽이는 이미 멈춰 있을 것이고

 

 쓰러지고 나서도 생각해 본다

 절벽 끝으로 몰린 머리가 새하얘질 때까지

 

 팽이는 힘이 다하고 나면 제풀에

 쓰러지고 마는 것이다

 너무나도 당연하게

 슬퍼하고 자시고 할 것도

 그럴

 겨를도 없이

 

 그러나 저 보름달!

 보름달이 뜨면

 슬퍼하는 이 여럿

 기뻐하는 이도 여럿

 

 강강수월래를 추며 다 같이 돌아 버리는 밤이 여럿

 

 달팽이 안에서 달팽이 밖으로

 달이 팽이처럼 돌아간다

 제자리에서 최고속도로

 최면을 걸어

 나는 달팽이라고

 라르고, 라아르고오오오오

 

 달팽이 속의 달이 뜨고

 그 둥그런 탄창 같은 달이 돌아가기 시작하는 것이다

 달팽이 속의 팽이처럼 돌아가기 시, 작, 하, 고,

 

 그럼 나는 그걸 한 번 힘껏! 후려쳐 보는 것이다

 더욱 빨라지는 강강수월래

 달팽이 안에 천둥이 치고

 번개가 껍질을 박살 내고

 

 달팽이의 술주정!

 빈 술병 위를 기어가는 달팽이!

 번개 문양으로 박살 난 술병 위를 지그재그로 기어 다니는,

 집에서 쫓겨나 급한 김에 자기 집만을 들쳐 메고 나온

 늙고! 무능한! 달팽이!

 

 잊을 만하면 언제나

 잊지 못할 일이 날 들이받고

 밤새 나는 아주 멀리 가서

 아침이면 아주 먼 거리가 되어 있곤 했다

 

 그 위로 왕소금 같은 비가 내리고

 

 지치면 오늘도 그냥 그 자리에서 곯아떨어지는 이가 여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