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유원 - 구경거리

사무엘럽 2020. 11. 21. 19:33

 

밀크북_2 세상의 모든 최대화, One color | One Size@1 이 왕관이 나는 마음에 드네 - 황유원 시집 (현대문학 핀 시리즈 시인선 14)[ 양장 ] 예언자, 민음사 일러스트 모비 딕 슬픔은 날개 달린 것:맥스 포터 장편소설, 문학동네

 

 

 빈 와인 잔에 포획된 채 한참을 이리저리 발버둥 치고

 미끄러지기만 하던 그리마는

 마침내 도망갈 곳이 없다는 걸 알게 되자

 난폭해지는 대신 잠시 시동을 끈 채

 완전한 침묵에 들었다

 이 의외의 태도 앞에 나는 좀 놀랐고

 나의 놀라움 따위엔 아랑곳하지 않은 채

 그리마는 이윽고 몸을 살짝 휘고는

 오른편에 있는 다리들부터 시작해 처음부터 하나씩

 차례로 핥아 주더니 다시 왼편에 있는 다리들을 처음부터 하나씩

 끝까지 차례대로

 방금 빤 물걸레로 교회 바닥이라도 닦고 있는 여인네처럼

 매우 정성 들여

 숭고하기까지 한 모습으로

 마치 너무 많고 긴 자신의 다리 하나하나가 고대의 필사본이라도 된다는 듯

 무언갈 아주 조금씩 씹어 삼킬 수밖에 없을 듯한 저작형 입으로 

 책장을 넘기듯 하나하나씩

 핥아 주는 것이었다

 숙연해진 마음에 그리마를 놓아주면

 다시 저 멀리 흘러가는 다리들

 그것은 분명 처음 보는 물결이고

 저 물결조차 없다면 육신은 얼마나 초라할 것인가

 강이 없는 강변처럼

 인파가 없는 강변의 카페처럼

 그러므로 물결이 있다

 물결이 있고

 그 물결이 동반하는 강변의 풍경이 있다

 하루의 요철을 다 견뎌 낸 후 잠시 카페에 앉아

 와인 잔의 다리나 만지작거리고 있는 내가 있고

 새벽이 다 되어 가는 강변

 세느 강이라 해도 좋고 홍제천이라 불러도 좋을 그곳에서

 마치 지금 자신은 갇혀 있지 않으며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는다는 듯이

 혹은 누가 좀 보면

 어떠냐는 듯이

 여유를 부리던 그리마를 떠올리며

 다시 한 번 잔을 드는 내가 있다

 붉은 와인이 수천 개의 다리를 달고서

 목구멍 속으로 기어들어 와 완전히 침묵하는 밤

 나 역시 도망칠 곳은 없다는 사실을 골똘히 떠올리며

 잔을 비우고 자리에서 일어나

 아무렇게나 한번 흘러가 본다

 와인 잔 속으로 흘러들어 왔다

 와인 잔 밖으로 흘러가던

 그리마의 물결을 흉내내며

 그리마의 심정으로

 그러나 그리마만도 못한 나의 물결을

 와인 잔 밖의 그대들이여

 그대들이나 나나

 인간은 하나의 구경거리

 실컷 감상하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