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유원 - 구경거리
빈 와인 잔에 포획된 채 한참을 이리저리 발버둥 치고
미끄러지기만 하던 그리마는
마침내 도망갈 곳이 없다는 걸 알게 되자
난폭해지는 대신 잠시 시동을 끈 채
완전한 침묵에 들었다
이 의외의 태도 앞에 나는 좀 놀랐고
나의 놀라움 따위엔 아랑곳하지 않은 채
그리마는 이윽고 몸을 살짝 휘고는
오른편에 있는 다리들부터 시작해 처음부터 하나씩
차례로 핥아 주더니 다시 왼편에 있는 다리들을 처음부터 하나씩
끝까지 차례대로
방금 빤 물걸레로 교회 바닥이라도 닦고 있는 여인네처럼
매우 정성 들여
숭고하기까지 한 모습으로
마치 너무 많고 긴 자신의 다리 하나하나가 고대의 필사본이라도 된다는 듯
무언갈 아주 조금씩 씹어 삼킬 수밖에 없을 듯한 저작형 입으로
책장을 넘기듯 하나하나씩
핥아 주는 것이었다
숙연해진 마음에 그리마를 놓아주면
다시 저 멀리 흘러가는 다리들
그것은 분명 처음 보는 물결이고
저 물결조차 없다면 육신은 얼마나 초라할 것인가
강이 없는 강변처럼
인파가 없는 강변의 카페처럼
그러므로 물결이 있다
물결이 있고
그 물결이 동반하는 강변의 풍경이 있다
하루의 요철을 다 견뎌 낸 후 잠시 카페에 앉아
와인 잔의 다리나 만지작거리고 있는 내가 있고
새벽이 다 되어 가는 강변
세느 강이라 해도 좋고 홍제천이라 불러도 좋을 그곳에서
마치 지금 자신은 갇혀 있지 않으며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는다는 듯이
혹은 누가 좀 보면
어떠냐는 듯이
여유를 부리던 그리마를 떠올리며
다시 한 번 잔을 드는 내가 있다
붉은 와인이 수천 개의 다리를 달고서
목구멍 속으로 기어들어 와 완전히 침묵하는 밤
나 역시 도망칠 곳은 없다는 사실을 골똘히 떠올리며
잔을 비우고 자리에서 일어나
아무렇게나 한번 흘러가 본다
와인 잔 속으로 흘러들어 왔다
와인 잔 밖으로 흘러가던
그리마의 물결을 흉내내며
그리마의 심정으로
그러나 그리마만도 못한 나의 물결을
와인 잔 밖의 그대들이여
그대들이나 나나
인간은 하나의 구경거리
실컷 감상하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