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유원 - 새들의 선회 연구

사무엘럽 2020. 11. 20. 10:34

 

밀크북_2 세상의 모든 최대화, One color | One Size@1 이 왕관이 나는 마음에 드네 - 황유원 시집 (현대문학 핀 시리즈 시인선 14)[ 양장 ] 예언자, 민음사 일러스트 모비 딕 슬픔은 날개 달린 것:맥스 포터 장편소설, 문학동네

 

 

 일단 사진으로 찍으면 정지.

 한곳으로 집중되는 힘들과 지금 막

 펼쳐지려 하는 힘들이 만들어 내는

 그대들의 온갖 선들도

 그대로 정지.

 

 그러나 찍기 전까지는 선회,

 찍고 난 후에도 선회,

 둥글고 둥글게 사과를 깎는 것처럼

 공중의 껍질을 밀어내듯 부드러운 과도의 동작으로 선회

 새들이 선회한 자리에선 사과 향기가 나고

 

 더 큰 원을 그려 봐야 원은 끊어지지 않아

 다만 바닥에 떨어지는 사과 껍질처럼 착지할 뿐

 천 년 전에 그랬던 것처럼

 꼭 천 년 후에도 그럴 것처럼

 깎아 놓은 사과의 속살 같은 하늘 남겨 두고서

 그대로 착지. 

 그리고 그 자리에 다름 아닌

 네가 있을 것.

 내가 자른 사과를 부리로 쪼아 먹으며

 부드러운 턱 운동과 함께

 그 자리에서 가장 둥글게 울고 있는

 네가 있을 것.

 높은 곳에서 떨어진 사과가 산산조각 날 때

 퍼지는 향기에는 상처 하나 없음을 수상히 여기다

 그냥 거기 드러누워 언덕이 되어 버리는

 언덕이 되어 그 향기 들이마시는

 너는 있을 것.

 

 흔적도 남지 않는 삶이 아니라

 다 살아 낸 삶이 남아 있는 흔적과

 이제 다 끝났다는 착각의 평화가 동시에 미끄러지는

 넉넉하고 공평한 언덕,

 평일이 모두 종말한 후

 혼자 남겨진 주말의 완벽한 휴식 같고

 졸음이 쏟아지는 베개 위로 흘러내리는 

 내용 없는 오후 같은 너의 언덕

 

 거기 항상 내가 있을 것.

 어떤 새가 또 태어나는 동안

 어떤 새는 새로 태어나기도 한다고 말해 주는 내가

 너처럼 나도 그렇게 항상

 네 옆에 있을 것.

 비 그치고 나뭇가지에 줄줄이 매달린 물방울 열매들

 그걸 따 먹는 새들의 목구멍이 순간 얼마나 맑고 시원해지는지!

 옆에서 함께 숨죽이고 지켜보는 심정이 되어

 찰칵, 그대로 정지했다가

 

 함께. 다시 날아오를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