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류근 - ( )
사무엘럽
2020. 11. 8. 11:09
놓여진 말들이 모두 붕붕거리며 허공에서 부대낀다 함부로 축제를 즐기던 밤은 지났다 그러므로 이제 잘 준비된 추락과 고통을 꿈꾸어야 할 때(라는 메모에 대해서)
그와 나는 같은 해에 태어났다 그해엔 공교롭게도
마시아마라에서도 섬진강에서도 뉴욕에서도
소녀들과 염소들이 태어났다 기억할 순 없지만 꽃들과 물고기들과
몇 개의 은행들도 새롭게 생겨났을 것이다 기억할 수 없다는 것
아름답지 않은가 몇몇 밤들의 연애와 혼돈과 방황들
자주 기억 밖에 머무는 것들은 누구의 것도 아니어서
아름답다 누구의 것도 아닌 삶을 살아내기 위해
결국 자기 안에 무덤을 팠던 사내를 나는 기꺼이 동무 삼고
구름 끝까지 데려가 온몸을 씻겨주고 애무하고
새처럼 안는다 간결하게도,
그런데 그런 것에 의미를 찾는 자들에 의해서
우리가 만든 무덤은 부풀어 오르고 차가워진다 우리는
만나지 못할 것이다 너의 겨울이 지나는 동안 나는 나무였다
단파 라디오에선 미국과 동독이 싸웠다
나는 그것을 다 알아들었지만 어머니의 재취업에 도움이 되진 않았으니까
우리 가족은 눈 내리는 과수원에 가서 빌었을 뿐
아버지, 새봄엔 부디 이 노란 씨앗이 썩어 푸른 호박이 되게 해주소서
선량한 나뭇잎들은 어디로 갔나 울고 싶은 오르막길들은 어디로 갔나
그와 나는 같은 해에 태어났다
그해엔 몹시도 우연찮은 것들이 세상에 많이 왔다 갔다
구름과 그와 나는 같은 주민번호 앞자리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