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해욱 - 국립도서관의 영원한 밤

사무엘럽 2020. 11. 19. 2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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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자리에서. 더할 나위 없는 내 자리에서. 너는 죽은 책을 읽고 있다.

 

 커튼이 부풀고 있다. 사물이 펼쳐지고 있다. 죽은 까마귀. 죽은 불가사리. 죽은 가자미. 죽은 노래의 메들리가 들려오고 있다.

 

 원을 그리면서. 반시계 방향으로 원을 그리면서. 나는 너의 동정을 살피고 있다.

 

 두 개의 귀. 열 개의 손톱. 어깨를 들썩이며 웃는 나쁜 버릇. 너는 죽은 농담의 뼈를 모으고 있다. 죽은 생각의 무덤을 파헤치고 있다. 죽은 단어를 모아둔 필통을 뒤적이고 있다. 죽은 가자미의 눈동자가 너를 노려보고 있다.

 

 수분 과다로 죽은 선인장에 나는 규칙적으로 물을 주고 있다. 화장실을 참고 있다. 발소리를 죽이고 있다. 원을 그리면서. 점점 더 완전한 원을 그리면서. 죽은 속담을 외우고 있다. 죽은 시계. 죽은 가마우지. 죽은 불가사리.

 

 딱딱한 것이 만져지고 있다.

 

 너는 웃고 있다. 내 자리에서. 더할 나위 없는 내 자리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