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오르크 트라클 - 심연에서

사무엘럽 2021. 6. 20. 22:22

 

몽상과 착란, ITTA 꿈속의 제바스치안:게오르크 트라클 시선집, 울력 푸른 순간 검은 예감, 민음사 색의 제국:트라클 시의 색채미학, 서강대학교출판부

 

 

 그루터기만 남은 밭이 있어, 검은 빗발을 온몸으로 받는다.

 갈색의 농부가 있어, 그 위에 혼자 서 있다.

 회오리바람이 있어, 텅 빈 오두막 주위를 휘몰아친다.

 이 얼마나 마음 아픈 저녁인가.

 

 마을 앞에서

 가녀린 고아 소녀가 얼마 안 되는 이삭을 줍는다.

 둥근 황금빛의 눈을 들어 노을에 풀어놓는다.

 그녀의 품속은 하늘의 신랑을 하염없이 기다린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목동들은 그 어여쁜 몸이

 가시덤불 속에서 썩어가는 것을 보았다.

 

 나는 컴컴한 마을들에 드리우는 먼 곳의 그림자다.

 신의 침묵을

 나는 숲의 샘에서 퍼마셨노라.

 

 내 이마에 닿는 차가운 금속

 거미들은 내 심장을 찾아든다.

 어느 빛이 있어, 내 입 속에서 영영 꺼져버렸다.

 

 밤이면 나는 어느덧 들판 위에 서서,

 쓰레기와 먼지에 뒤덮인 채로 별을 바라본다.

 개암나무 덤불에서

 또 한 번, 수정 같은 천사들이 움직이는 소리가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