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르헤스 - 아리오스토와 아랍인들
그 누구도 책을 쓸 수 없다.
진정한 한 권의 책이 되기 위해서는
여명과 석양, 세월, 무기,
만남과 헤어짐의 바다가 필요하니까.
아리오스토는 그렇게 생각했고,
밝은 대리석과 짙은 소나무가
어우러진 여유로운 길에서
이미 꿈꾼 것을 다시 꿈꾸는 느긋한 즐거움에 몸을 맡겼네.
그의 이탈리아의 공기는 꿈으로 부풀어 있었네,
고난의 세월 동안
대지를 탈진시킨 전쟁의 꿈이
기억과 망각의 날실을 자아냈지.
아키타니아 계곡으로 들어갔던
한 부대가 매복에 빠졌네.
롱스발에서 요동친 뿔나팔과 검의
꿈은 이렇게 탄생했네.
강인한 색슨 족은 오랜 치열한 전쟁을 치르며
영국의 텃밭마다
영웅들과 군대를 흩뿌렸네.
여기서 아서 왕의 꿈이 유래했지.
눈부신 태양이 대양마저 삼켜 버리는
북방 군도로부터
불에 둘러싸여 주인을 기다리는
잠든 처녀의 꿈이 비롯됐네.
무장한 마법사에 의해 공중을 재촉하다
황량한 석양으로 가라앉는
날개 달린 준마의 꿈은
페르시아에서일까, 파르나소스에서일까.
마법사의 준마 위에서 내려다보듯,
아리오스토는 보았지.
전쟁의 향연이 일구어 논 지상의 왕국들과
파란만장한 청춘의 사랑을.
희미한 황금 안개 사이로 보듯,
안젤리카와 메도로의 사랑을 위해
또 다른 은근한 정원들로 경계를 넓혀 가는
어느 한 정원을 지상에서 보았지.
힌두스탄이 아편에 취해
언뜻 보는 환영의 광채처럼,
만화경 같은 무질서 속에 펼쳐지는
사랑이 오를란도를 스치네.
사랑도 아이러니도 무시하지 않고,
이렇게 품위 있게
(삶에서처럼) 모든 것이 날조된
독특한 성을 꿈꿨네.
어느 시인에게나 그렇듯,
운명 혹은 숙명이 흔치 않은 행운을 주었네.
페라라의 길을 걷는 것과 동시에
달을 거닐었으니.
꿈에 그리던 나일 강이 퇴적시키는 점토와
다를 바 없는 꿈꾸다 남은 찌꺼기로
찬란한 미로의 실 꾸러미를
자아냈다네.
육신도 자기 이름도 망각하고
태평스런 음악의 영역을
열락에 겨워 헤매일 수 있을
커다란 다이아몬드의 실 꾸러미를.
유럽 전역이 자취를 감췄네.
그 천진스럽고 심술궂은 예술 때문에,
밀턴은 브라다만테의 최후와
달린다의 불안에 울 수 있었지.
유럽이 자취를 감췄네.
하나 광대무변한 꿈은
동방의 사막과 사자가 득실거리는 밤을 살아가는
이름 높은 이들에게 다른 축복을 주었지.
아직까지도 시간을 마법으로 흘리는
열락의 책이 이야기하네.
새날이 움틀 때 무자비한 신월도에
하룻밤 동안의 여왕을 내맡기는 왕에 대해서.
갑자기 밤을 만드는 날개,
코끼리 한 마리를 낚아챈 잔혹한 발톱,
연인의 포옹으로 선박들을 갈가리 부수는
자색의 산봉우리들,
황소에 의해 지탱되는 대지,
물고기에 의해 지탱되는 황소.
바윗덩어리에 황금의 동굴을 여는
주문, 부적, 신비주의적 말.
아그라만테의 깃발을 추종하는
사라센인들은 이를 꿈꾸었네.
터번을 쓴 아련한 얼굴들이 꿈꾸었던
이것들이 서구를 사로잡았네.
오를란도는 지금은 사람이 거주할 수 없을
공간을 연장시키는 유쾌한 지역이네.
이제 아무도 꿈꾸지 않는 한바탕 꿈에 불과한
무감각하고 여유로운 경이의 공간.
단순한 박학자나 이야기꾼쯤으로 여긴다 해도,
그는 이슬람 예술 때문에
홀로 꿈을 꾸고 있네.
(영광은 망각의 한 형태이지.)
이미 창백해진 유리창으로, 흔들리는
석양빛이 오늘도 책을 어루만지네.
표지에 영광을 더하는 황금빛이
불타올랐다가는 사그라드네.
적막한 거실에서
침묵의 책이 시간을 여행하네.
여명, 밤 시간,
황급한 꿈인 내 삶을 뒤로하고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