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니 - 푸른 물이다

사무엘럽 2021. 6. 9. 00:32

 

그리하여 흘려 쓴 것들:이제니 시집, 문학과지성사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를 모르고, 문학과지성사 있지도 않은 문장은 아름답고:이제니 시집, 현대문학 아마도 아프리카 (창비시선 321), 창비

 

 

 풀이 나고 자라는 푸른 들판 속에 어리고 붉은 벌레가 숨어 있다. 개암나무 가지의 검은 구멍 속으로 끊이지 않는 노래를 들이부었다. 말할 수 없는 말로 부를 수 없는 노래를 만들어 불렀다. 지평선은 거울의 저쪽에 있었다. 태양의 반사경을 머리 위에 두었다. 뜨거움이 심장까지 곧장 내려왔다. 울음이 오면 꽃잎도 따라 왔다. 모래와도 같은 기억이 흩어졌다. 푸른 들판 너머에는 푸른 물이 있었다. 푸른 물이 있다라고 쓰면 푸른 물이 눈앞에 펼쳐질 것처럼. 푸른 물 아래에는 보이지 않는 구름이 있었다. 간신히 말할 수밖에 없는 한 숨결이 있었다. 교회 종탑 너머로 한 줄기 빛이 날아와 아프게 나를 찔렀다. 눈은 부시고 빛은 어둠이고 나는 잠깐 죽었다. 다시 살아나면 그 곁에 푸른 들판이 있었다. 푸른 들판 너머로 다시 푸른 물이 다가왔다. 집으로 돌아오면 얼굴을 씻었다. 거울의 저쪽은 거울의 이쪽과는 무관하게 빛나고 있었다. 거울의 이쪽은 거울의 저쪽과는 무관하게 열리고 있었다. 문이 열리면 안과 밖이 생겨나고. 안과 밖과는 무관하게 자꾸만 열리는 것은 푸른 물이다 푸른 물이다. 어제의 얼굴을 보고 있었다. 어제의 목소리를 듣고 있었다. 의지와 무관하게 의자에 앉아 있었다. 떠난 사람 곁으로 떠나려는 물결이 있었다. 푸른 물을 바라보며 자꾸만 푸른 물이다 푸른 물이다. 너무 울어 남아 있지 않은 눈물로 푸른 물이다 푸른 물이다. 풀어질 수 없는 마음이 있었다. 잊지 못하는 빛이 있었다. 기다려도 오지 않으니까. 기다려도 오지 않는다는 것을 아니까. 푸른 물이다 푸른 물이다. 될 수 있으면 천천히 오래오래 기다리기로 하고. 푸른 물이다 푸른 물이다. 잠들기 직전에는 죽은 사람이 쓴 책을 읽었다. 대화는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내내 이어졌다. 푸른 물 아래에는 여전히 가슴을 두드리는 구름이 있었다. 춥고 무겁게 나는 무릎을 꿇었다.